[상무정신(3)] 고려시대의 상무정신과 주요사례

삼국시대가 생존과 영토확장을 위한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고 상무정신을 중시하였던 반면, 고구려의 계승국을 표방한 고려는 거란과 몽골 등의 외부 침략에 대한 방어와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군사적 저항이 상무정신을 강화시켰다.

김칠주 편집위원 승인 2024.10.23 13:56 의견 0

김칠주 편집위원
정치학 박사, KMA역사포럼 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


북진정책과 대외항쟁

고려(高麗)는 태조 왕건에 의해 918년에 건국되어 1392년까지 34대 474년간 이어진 중세 한국의 왕조로, 외세의 침입과 내부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다양한 상무정신(尙武精神)이 발휘되었다. 고구려의 계승국을 표방한 만큼 후기 고구려의 국호인 '고려'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919년에 송악을 개경이라 이름을 고치고 수도로 삼았다. 그 뒤, 935년 신라, 936년 후백제를 차례로 복속시켰다.

태조 왕건 표준영정(출처:우리역사넷)


태조 왕건의 상무정신과 훈요십조
태조(太祖 王建, 즉위 918~943년)는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강력한 군사적 역량을 바탕으로 고려를 건국했다. 특히 927년 대구 공산에서 벌어진 후백제 견훤과의 전투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를 물리치고 승리하면서 자신의 군사적 지도력을 입증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항상 상무정신을 강조하며, 싸움의 의지를 북돋아 주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태조는 "나라를 세우려면 천하를 통합하고 무력을 다스리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무신적 기질과 전략적 감각을 기반으로 나라를 통일한 태조의 상무정신을 알 수 있다. 태조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여 고려 통일을 이루었는데, 이는 고려 건국의 바탕이 되었던 상무정신의 중요한 발현으로 평가된다. 또한 태조는 훈요 10조(訓要十條)에서 상무정신을 명확히 언급하며 고려 왕조가 군사적 기강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훈요 10조의 제9조에 “又以强惡之國爲隣,安不可忘危,兵卒宜加護卹,量除徭役 每年秋閱,勇銳出衆者隨宜加授”
“또한 강하고 악한 나라와 이웃하고 있으니 편안할 때도 위태로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병졸은 마땅히 지켜주고 보살펴주며 요역을 헤아려 면제해 주고 매년 가을에 무용이 남들보다 뛰어난 자를 사열하여 편의에 따라 벼슬을 더하여라.” (『고려사』 권 2, 「세가」 2 태조 26년 4월)

북진정책과 영토 확장

고려 태조의 북진정책은 고려 건국 후 왕조의 기반을 확립하면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반영한다. 태조는 "나는 고구려의 후손이니, 반드시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라고 강조했으며, 이를 통해 북쪽으로의 확장 정책을 펼쳤다. 그는 옛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이 황폐해져서 번인(오랑캐)들이 무시로 드나든다는 이유로 918년에 평양 지역을 대도호부(平壤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패서 지역으로 백성들을 옮겼으며 곧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격상하여 국토 확장의 중심으로 삼았다.

3차례 거란과의 전쟁과 상무정신

고려시대는 외세의 침략이 빈번한 시기였다. 거란(契丹), 여진(女眞), 몽골(蒙古) 등 주변 국가들로부터 지속적인 군사적 위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이러한 외적의 위협을 여러 차례 극복했다. 특히 거란은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반까지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다. 고려-거란 1차 전쟁은 993년(성종 12년) 5월과 8월에 거란(요나라)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으나, 병관 어사인 문신 서희는 적장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으로 전쟁 없이 해결되었고, 오히려 고려는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옛 영토를 확보했다. 2차 전쟁은 1010년(현종 1년) 11월, 강조의 정변으로 인한 고려의 내부 혼란을 틈타 거란이 다시 침입했다. 고려는 일시적으로 개경을 빼앗겼으나, 현종과 강감찬의 전략으로 반격에 성공했다. 3차 전쟁은 1018년(현종 9년) 12월, 거란의 대규모 침입이 있었으나, 서경유수 강감찬이 상장군이 되어 귀주대첩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며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를 국왕, 장수, 국민의 3자 측면에서 상무정신 차원에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왕 현종은 군사적 지도자로서 전쟁 중 피난을 가면서도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 국가 방어의 의지를 굳게 유지하여 승리를 이끌었다. 특히 강력한 방어 의지, 무신들에 대한 신뢰와 권한 부여, 민·관·군의 통합전략으로 2차례의 거란 침공을 격퇴할 수 있었다.
서희와 강감찬은 문신이었으나 기지를 발휘하고, 특히 강감찬이 귀주대첩에서 보여준 것처럼 뛰어난 전략가이자 군사 지도자로서 국가 방어에 탁월한 상무정신을 발휘했다. 고려의 백성들은 외침에 맞서 전쟁을 함께 겪으며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저항 의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농민군과 의병들이 전투에 참여해 적을 방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 정신은 고려와 조선,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3차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후인 1033년(덕종 2년)에 평장사 유소(柳韶)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였다. 유소는 옛 석성(石城)을 수리하고 위원진, 정융진을 두어 국방을 강화하였고, 이러한 석성들을 바탕으로 축성 계획을 세워 국경 각지에 산재해 있던 성들을 연결하고 새로 축조하거나 보수하여 11년이 지난 1044년(정종 10년)에 완성하였다.

여진과의 전쟁과 윤관의 동북 9성 개척

윤관(尹瓘, ?~1111)은 고려시대 대표적인 군사적 지도자로서 여진족 정벌과 동북 9성 축조를 통해 고려의 국방을 강화했다. 윤관은 고려의 국경을 침범하던 여진족을 무찌르고, 동북 지역에 9개의 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를 확장했다. 이때 그는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조직해 기병, 보병, 궁수로 구성된 효율적인 전투 부대를 운영했다.
윤관은 단순 방어가 아닌 적극적 공격을 통해 적을 제압하고 국경을 확장했다. 윤관은 여진의 주력이 기병인데 비해, 고려는 보병 위주라는 취약함을 인식하여 별무반이라는 새로운 군사조직을 숙종에게 건의하였다. 숙종은 이러한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정규군 외에 기마병으로 구성된 신기군(神騎軍),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神步軍), 승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으로 편성된 별무반을 조직하였다. 이는 양반부터 노비까지 여러 신분층이 포함된 특별군대로, 나이 스물 이상의 모든 백성을 별무반에 의무적으로 편제할 정도로, 별무반은 위로는 귀족에서부터 아래로는 양인 농민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계층에서 동원된 거국적인 군사조직이었다. 윤관이 1107년(예종 2년) 17만의 별무반을 이끌고 출진하자 여진족은 9성의 환부를 조건으로 화친을 요청해 옴으로써 여진과 강화하고 동북에 9성을 축조하였다. 별무반은 병농일치(兵農一致)에 입각한 군사조직이었다. 별무반의 활약은 단순히 군사적 승리만 아니라 무관의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윤관의 전략적 결단과 군사적 혁신은 고려의 상무정신을 발전시키고 국방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 중요한 업적이다. 참고로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의 세종은 4군 6진의 개척 명분을 "공험진이 두만강 위 700리이니 두만강까지 우리 땅이다”로 정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3차에 걸친 고려-거란전쟁 (출처: 우리역사넷)

윤관의 9성 개척설 (출처: 나무위키)



고려 무인 정권과 대몽항쟁

고려는 문치주의 사회였고, 문신들이 권력을 장악하며 무신들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 이는 무신들에게 큰 불만을 안겨주었으며, 궁극적으로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문신들의 무신 경시와 사회적 차별이 무신들의 반발을 초래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무신들은 전장에서 큰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대우와 사회적 지위에서 문신들에게 밀려나 문신들과의 갈등을 키우게 했다. 《고려사》에서 당시 무신들이 느낀 좌절감과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언급이 있다.
결국 1170년,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무신정권이 시작되었다. 무신정권은 정중부를 시작으로 최씨 정권까지 약 100년간 지속되었다. 정중부, 최충헌, 최우 등이 무신정권의 대표 인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고려 무신정권 시기에 고려와 몽골 간의 지속적인 전쟁이 있었다.

몽골의 침입과 삼별초 항쟁 Ⓒ초등사회 한국사



몽골은 1231년 첫 침입을 시작으로 고려를 압박했으나, 고려는 무신정권하에서 강력한 저항을 펼쳤다. 특히 최우는 국권을 유지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겨 꿋꿋이 항전을 지휘하였고, 육지에서는 일반 민중이 침략군에게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특히 무신정권은 농민들로 하여금 산성과 해도(海島)로 들어가는 정책을 시행하여 이 기지를 중심으로 집단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싸워 항전의 주체가 되었다. 1259년(고종 46)에 강화가 이루어졌지만, 고려와 몽골과의 관계는 불안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1270년(원종 11)에 개경(開京) 환도가 단행되었다.

삼별초의 항쟁

삼별초(三別抄)는 몽골의 고려 침입이 시작되기 직전인 고려 고종(高宗) 초기, 1220년대에 당시의 무신 집정자 최우가 수도 개경의 치안을 위해서 조직한 군대인 야별초(夜別抄)에 그 기원을 둔다. 야별초는 이후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나뉘었으며, 여기에 몽골에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군인들로 구성된 신의군(神義軍)을 합하여 삼별초라고 불렀다. 삼별초는 무신 집정자들의 무력 기반으로서, 강화 천도 시절 강화도의 치안을 유지하고, 무신정권의 수호집단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편 삼별초는 몽골과의 전쟁에서도 큰 활약을 하였다. 몽골의 거듭된 침입에 맞서 고려의 정규군이 거의 궤멸된 상황에 이르렀을 때 고려 정부가 보유한 유일한 정예군 조직이었던 삼별초는 기동성을 발휘하여 적진을 기습하거나 매복, 정탐 등의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무신 집정자들이 사병의 성격으로 길러낸 부대가, 고려의 대몽 항전의 최후 보루가 되었던 셈이다.
1259년 고려가 몽골과 강화 협정을 맺었을 때, 삼별초는 이를 반대하며 끝까지 저항했다. 삼별초는 지휘부를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기고, 최종적으로 제주도로 이동하여 독립적인 항전을 이어갔다. 이들은 고려 왕조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몽골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1273년 제주도에서 패배하며 항쟁이 막을 내렸다. 삼별초의 저항은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군사적 저항으로, 상무정신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총 7차에 걸친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의 토지는 황폐해지고 민중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으나, 고려 민중들의 끈질긴 항전으로 몽골은 고려를 직속령으로 삼으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하게 된다.

고려시대 상무정신의 국왕-군사력-백성의 3자 분석

고려시대는 상무정신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시대로, 국가의 안정과 독립을 위해 고려인들이 힘을 모으고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는 정신을 보여주었다.
고려시대 상무정신을 국왕, 군사력, 백성이라는 세 차원에서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의 상무정신은 국왕의 역할과 통치 철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고려 초기 태조 왕건을 비롯한 여러 국왕은 상무정신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상무정신에 대한 각 국왕의 인식과 정책은 달라졌다. 태조 왕건과 광종 같은 초기 고려 국왕들은 군사적 역량을 중시하고, 상무정신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를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성종을 비롯한 중기 국왕들은 유교적 통치 이념을 도입하며 문치주의에 기울었고, 이는 결국 무신정변의 배경이 되었다. 무신정권 동안 국왕의 역할은 많이 축소되었고, 상무정신을 내세운 군사 지도자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무신정권이 끝난 후에도 고려 후기 국왕들은 몽골의 간섭 속에서 군사적 자주성을 상실하며 상무정신이 쇠퇴하게 된다.
둘째, 고려의 상무정신은 군사력의 발전과 군사 정책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 초기는 여러 왕조와의 전쟁을 겪으며 군사적 역량을 강화해야 했다. 이때 상무정신은 국방과 왕권 강화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국왕들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가를 안정시키고 외부의 위협에 대응했다. 태조는 특히 군사적 통합을 통해 국가를 세우는 데 상무정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상무정신은 더욱 고양되었다. 최충헌, 최우 등의 무신 지도자들은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고, 국방과 전쟁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몽골의 침략에 맞서 고려는 무신정권 하에서 상무정신을 바탕으로 군사적 저항을 시도했다. 무신정권이 종결된 후, 몽골과의 강화로 인해 군사적 자주성이 약화되었고, 상무정신도 쇠퇴했다.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해 독자적인 군사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고, 군사적 상무정신 또한 약화되었다.
셋째, 고려시대 상무정신은 고려 사회에서 백성의 인식과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려 초기에 상무정신은 주로 왕권과 군사 귀족들 중심의 사상이었으며, 백성들은 전쟁과 군역을 통해 상무정신에 참여했다. 왕건의 통치 아래 상무정신은 백성들을 결속시키는 수단이 되었고,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무신정권 시기에 백성들은 무신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전쟁과 방어를 위한 군사적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몽골 침략과 같은 외적의 위협 속에서 상무정신은 백성의 생존과 직결되었으며, 무신정권은 백성의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무신정권이 끝나고 몽골의 지배가 강화되면서 백성들은 상무정신보다는 문치주의 아래 평화를 중시하는 경향으로 변화했다. 또한, 백성들은 더 이상 군사적 활동에 집중하기보다는 생업과 문치적 질서에 적응해야 했다.

상무정신과 문치주의의 대립

결론적으로, 고려시대의 상무정신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크게 변화한 군사적 가치와 사상으로, 초기에는 왕권과 국가 안정을 위한 중요한 요소였으나 문치주의와 군사적 권력 변화에 따라 그 강조점이 달라졌다.
고려 초기에 상무정신은 필수적이었으며, 태조 왕건을 비롯한 초기 국왕들은 국가 통합과 외적 방어를 위해 군사력을 중시하고 상무정신을 적극적으로 고취했다. 상무정신은 왕권 강화와 국가 안정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기에는 문치주의가 강화되면서 상무정신이 약화되었다. 성종시대에 들어 문신 우대 정책과 유교적 통치 이념이 강화되면서 상무정신은 상대적으로 후퇴했으며, 무신들이 정치적, 군사적 측면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낳았다.
무신정권 시기에는 상무정신이 다시 고양되었다. 무신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면서 군사력과 무력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국가 운영의 중심에 상무정신이 자리잡았다. 특히 외적의 침입에 맞서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무신정권 종결 후에는 상무정신이 쇠퇴하였다. 몽골의 간섭과 문치주의의 복귀로 인해 상무정신은 점차 사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고려 후기에는 상무정신이 크게 약화된 상태로 이어졌다.
결국 고려시대 상무정신은 국가의 군사적 필요성과 통치 이념에 따라 상승과 쇠퇴를 반복한 사상으로, 정치적 상황에 따라 그 중요성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 🅿

국민희망저널 2024년 10월호 (제17호) 상무정신(3) | 9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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