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초대석 | 통일] 독일의 합의통일과 교훈-국민적 공감대와 지도자의 강력한 리더십이 원동력

20세기에 들어 분단국가가 통일을 이룬 나라가 3개 국가이다. 무력 통일한 베트남, 흡수 통일한 독일, 합의 통일하였다가 무력 통일한 예멘이 그 예다. 여기서는 독일의 분단과 통일 준비, 통일 과정을 알아보면서 우리의 통일에 필요한 교훈을 찾아보기로 한다.

김칠주 편집위원 승인 2024.09.26 19:20 | 최종 수정 2024.09.26 19:40 의견 0

김칠주 정치학박사
KMA역사탐방포럼 회장
국민희망저널 편집위원

1단계(1945~68) : 동서독의 분할 및 긴장 형성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5년 5월 독일 항복 이후 독일이 다시 결합하여 전쟁을 도발하지 못하게 하려고 연합국에 의해 4개의 점령지역으로 분할하여 통치하게 됩니다. 이때 독일의 상징인 수도 베를린도 어느 한 지역에 속할 수 없다고 하여 4개국이 점령하게 됩니다. 그래도 각 지역은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생활하였습니다. 이후 동독은 소련 점령하의 공산주의 체제로, 미국, 영국, 프랑스 3개국의 점령지 서독지역은 자본주의 체제로 가게 됩니다.
독일의 동서독 분할 등의 계기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가 마찰을 빚게 되자 이때 미국은 전통적인 고립주의인 먼로 독트린을 버리고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하여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하는 트루먼 독트린을 펼치게 됩니다. 또한 황폐해진 유럽을 재건축하고 미국 경제를 복구시키며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자 마샬플랜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지지하게 됩니다.

독일과 베를린의 4개국 분할 점령(1945.5.23~1949.10.7) (자료출처=나무위키


미국이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사상 최대의 경제지원책을 펼치자, 소련은 이에 대항하여 1948년 6월13일 베를린 봉쇄를 하게 됩니다. 베를린 시민 200만 명이 고립되자 미국은 공수작전으로 대규모 생필품과 석탄 등을 보급하였습니다. 미국의 공수작전에 베를린 시민과 독일 국민의 미국에 대한 지지는 더욱 커지게 되자 결국 소련은 8개월 만에 봉쇄를 풀게 됩니다.
봉쇄령 해제 이후 서방 연합국은 이후에 재발할 소련의 움직임에 대비해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설립하였고 소련은 이에 맞서 공산주의 군사동맹 조약인 바르샤바 조약기구(WTO)를 설립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양국 간의 상황은 더 악화되어 하루에 최대 899명 정도가 동독에서 서독으로 도망쳐 12년 동안 273만 명이 탈출하게 됩니다. 급기야 동독은 소련의 허가를 받아 1961년에 155km에 달하는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여 베를린은 동서로 분리됩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후 약 5000명이 탈출하게 되며 140명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장벽으로 탈출이 어려워지자, 지하로 70여 개 터널을 만들어 300여 명이 서독으로 탈출하게 됩니다.
이러한 양측의 단절 속에서도 잠시 만날 수 있는 곳이 있었으니 프리드리히 슈트가르테라는 기차역으로 동서독 열차를 갈아탈 수 있는 곳이어서 헤어진 사람들이 잠깐 만나 얼굴을 보고 눈물로 헤어지는 일이 많아 ‘눈물의 궁전’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베를린장벽 장애물 요도 (자료출처=나무위키)


2단계(1969~89) : 동서독의 화해협력기, 서독의 동방정책
서독과 NATO 동맹은 아데나워 서독 총리 시(임기 1949.9~63.10) 서독의 외무장관이었던 할슈타인이 1955년 2월에 주장한 할슈타인 독트린, 즉 독일의 유일한 합법 정부는 독일연방공화국이라는 원칙 아래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으려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한다는 원칙에 따라 동독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빌리 브란트(임기 1969.10~75.5)의 화해 정책인 동방정책으로 서독은 동독을 포함한 유럽 공산국가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당시 빌리 브란트는 제2차 세계 대전 피해국 폴란드를 방문하여 전쟁 희생자 비석 앞에 직접 무릎을 꿇어 큰 화제가 되었으며, 동독도 방문하였습니다. 하지만 냉전 상태였으므로 미국과 서독 내의 보수파는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반대하였습니다.
동서독은 남북한과 다르게 통행과 서신교환이 가능했습니다. 1973년부터 양국은 상호 기자단을 파견하였고 동독에서도 서독의 라디오와 TV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독 여행경비를 서독에서 지원해 주기도 했습니다. 동서독의 경제적 격차는 그나마 적었습니다. 동유럽 국가 중에 1세대 1자가용을 갖고 있는 나라는 동독일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동독인들은 서독인들의 자유롭고 풍요로운 생활상을 보고 통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되어 갔습니다.


3단계(1990년 이후) 동서독의 통일기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고르바초프가 등장하여 소련 정부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자 개혁개방정책을 표방하면서 공산주의 체제를 포기하고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수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동유럽 국가의 민주화에 획기적으로 기여하게 됩니다. 1989년 8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 국경의 제한을 풀자 1만 3000여명의 동독 사람이 같은 공산국가였던 헝가리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습니다.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있었던 월요일의 데모를 비롯하여 동독 정부에 대항하는 많은 데모가 이루어졌는데, 당시 동독 인민들은 "우리가 인민입니다(독일어: Wir Sind Das Volk). 권력은 SED(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것이 아니다."라며 민주주의를 요구하였습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시위 때에는 “Wir Sind Ein Volk(우리는 한 국민입니다.)”라며 독일 통일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동독의 통치자였던 에리히 호네커는 민중항쟁에 굴복하여 1989년 10월 18일 사임하게 됩니다.


동독에서 시위와 탈출이 이어지자, 세기의 말실수가 나오게 되어 전혀 예기치 않던 곳에서 통일의 물꼬가 터지게 됩니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치국 대변인으로 막 임명된 귄터 샤보브스키의 결정적인 말실수가 그것이었습니다. 한 기자의 “동독인들은 언제쯤 자유롭게 서유럽으로 여행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업무파악이 아직 덜된 대변인은 “지금 당장입니다.(this is immediately, without delay)”라고 대답했는데 이 장면이 TV로 방영되기 무섭게 수많은 동독인이 베를린 장벽으로 달려갔습니다. 너무 많은 주민이 달려오자, 국경수비대도 시위대를 막지 못했습니다. 일부 흥분한 사람들은 도끼와 망치로 장벽을 부수어 그들은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국경 아닌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건너갔고, 그날 밤 베를린 장벽은 무너진 것입니다.


1989년 11월 28일 콜 서독 총리는 동·서독이 궁극적인 통일을 향한 준비 단계로 연방을 구성하는 내용 등을 담은 통일독일방안 10개 항을 발표했습니다. 이러한 통독안(案)에 대해 소련 등 동유럽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미국과 나토는 조심스럽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콜 총리 ‘독일과 유럽의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 방안’을 제시.
(1989년 11월 28일)


① 동독에 대한 인도적 분야와 의료 분야의 즉각 지원
② 경제, 과학, 기술, 문화, 환경에서 동독과 협력
③ 헌법 개정과 새로운 선거법 제정을 조건으로 서독이 경제 원조와 협력 확대
④ 조약 공동체 고려를 위해 공동 위원회 구성
⑤ 동서독 간 국가 연합적 조직으로 발전 이를 위해 동독에서 민주적 정통성 있는 정부 구성
⑥ 통독 문제는 유럽통합 및 동서 관계 개선과 연계시켜 실현
⑦ 유럽 경제 공동체(EC)는 전 유럽 발전의 핵심으로 동독도 포함
⑧ 유럽 안보협력회의(CSCE)는 전 유럽 핵심 조직으로 환경보존, 동서무역 협력 촉진 기구로 발전
⑨ 유럽의 분단과 독일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광범위한 군비 축소와 군비 통제
⑩ 동독 및 유럽 안정 실현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 독일 통일은 변함없는 정치적 목표임.

자료출처 | 독일 통일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2017.7, 통일아카데미, 김학재) 기초로 편집


1990년 5월 18일 양쪽 독일은 경제, 통화, 사회의 통합을 협상하여 7월 1일에 실시했습니다. 8월 23일 동독 의회는 메이에르 동독 총리가 제안한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하는 방안에 동의했으며, 7월 1일 경제통일이 시행되어 서독의 독일 마르크로 화폐가 통일되었습니다. 동독화폐가 폐지되었고, 구동독 화폐와 구서독 화폐가 새로운 화폐로 교환되었습니다. 8월 31일 양쪽 독일의 대표는 ‘통일 조약’에 조인했습니다.
9월 12일, 동서독+ 4(미, 영, 불, 소) 조약으로 독일은 주변국과 함께 독일 관련 최종 해결에 관한 조약 (2+4 협상)을 조인하면서 공식적으로 주권을 인정받았습니다. 1990년 10월 3일, 동독의 다섯 개 주가 서독으로 편입되면서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독일의 통일 교훈과 한반도통일 과제
독일 통일은 내적, 외적 요인에 의해 가능했다고 평가됩니다. 우선 외적 요인으로 1989~1990년 소련의 붕괴와 동유럽의 체제 전환입니다. 냉전이 종식되고 동구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체제를 전환하기 시작하고, 동독과 동유럽의 자유화,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것이 국제적 환경이었습니다. 다음 내적 요인으로 이러한 상황에서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독일 정치 체제, 경제력, 외교 안보, 사회 전체가 1960년대 초반부터 수십 년간 이루어 낸 과정과 축적된 역량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한반도통일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내적 요인 조성으로 한국 내 통일 비전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 한국의 경제역량 강화와 북한 개혁개방 유도로 통일비용 최소화 노력, 외적 요인으로 한반도통일에 대한 국제적인 지지환경 조성입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정치지도자의 비전과 결기, 용기 있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첫째, 통일에 대한 당위성 조성과 통일비전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 분야별 준비가 필요합니다.
한국에서는 보수 진보 정권이 교체할 때마다 통일정책과 대북정책이 변동이 심했습니다. 국민적 합의를 거쳐 통일방안에 대한 재정립, 국민적 공감대 형성과 준비, 신념을 견지하고 통일을 추진하는 정책추진이 필요합니다. 또한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의 실질적인 운용, 학교기관의 통일 교육, 각 행정부에서의 통일에 대한 장기정책 준비, 의회의 통일헌법과 분야별 통일과제에 대한 입법 준비 등이 필요합니다.

1990년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2+4 회담 (출처=독일연방기록원


둘째, 한국의 경제역량 강화와 북한 개혁·개방 유도로 통일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막대한 통일비용과 통일 후 한국경제의 부담으로 통일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서독 할레연구소의 블룸 소장은 독일통일 당시 동서독 인구 비율은 약 3.8 대 1(서독 6,500만, 동독 1,700만 명)이고 1인당 GDP는 약 3 대 1이어서 경제력 격차는 약 11.4 대 1이었지만, 현재 남북한의 인구비는 2 대 1이고 1인당 GDP는 30 대 1이며 경제력 격차가 59.8 대 1이므로 한국인의 체감 부담액은 통일 당시의 서독인들보다 훨씬 더 클 것으로 평가됩니다. 따라서 한국 경제의 역량 강화와 통일비용 준비, 북한 주민 소득 수준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북한의 개혁개방을 위해 북한 내 다국적 공단을 설립하는 것입니다. 개성공단같이 한국만 들어가는 것은 폐쇄 위험이 있으니, 다국적기업을 유도해 공단을 수출이 쉬운 지역에 조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셋째, 한반도통일에 대한 국제적인 지지 환경조성입니다.
독일이 2+4 전략을 추진하면서 4개국에 대해 맞춤형으로 접근했듯이 우리도 2(남북한)+4(미일 중러)에 대해 맞춤형 전략을 구사하여 통일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야 합니다. 한·미동맹을 대외전략의 주축으로 삼되 대미일변도 외교를 지양하여 중·러와도 경제와 안보 협력을 도모하고 미·일‧중·러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통일 비전 제시가 중요합니다.
특히 중국은 통일시 한반도의 반중 가능성과 주한미군의 중국국경 주둔을 두려워합니다. 따라서 중국에 대해 통일 한반도가 평화롭고 안정적인 지역 환경을 이루어 중국의 번영과 동북아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데 유리하다는 ‘한반도 통일 이익론’을 설파하고, ‘한반도 통일위협론’을 완화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야 합니다. 일본에 대해서는 통일한국이 반일 친중국화 또는 통일한국의 핵 보유 위협 등에 우려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미일 협력을 강화하고 통일 후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신뢰를 주어야 합니다. 러시아는 통일 한국에 대한 영향력 상실과 친중 일변도 정책을 두려워합니다. 따라서 러시아가 국가안보와 동아시아 전략 면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면에서도 시베리아 극동지역의 개발과 에너지 협력 및 환동해권 철도 연결을 통한 물류사업 등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지속적으로 주지시켜야 합니다.


넷째, 정치지도자의 통일에 대한 비전과 결기 있는 실천이 요구됩니다.
결론적으로 독일 콜 총리(임기 1982.10~1998.10) 같은 끈기가 있고 결기 있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서독 콜 총리는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임기 1981.5~1995.5)을 임기중에 80여 회 만나면서 신뢰를 강화해 나갔으며 통일독일의 유럽 내 영향력 강화를 두려워하여 겉으로는 주변국과 공동보조를 취했으나 실제는 독일 통일에 더욱 반대한 영국, 독일 통일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한 소련의 고르바초프에게는 통일독일의 유럽안보기구회의 참가, 통일독일의 중립화 약속 등으로 설득해 나갔습니다. 물론 미국에 지속적인 친미 정책으로 신뢰를 획득하여 미국의 적극 지지를 받은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한반도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습니다. 그래서 정치지도자의 역량 있는 리더십, 전 국민적인 공감대 형성과 국제적인 지지환경 조성,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안보태세를 기초로 한반도통일을 실질적으로 준비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자유민주통일강대국의 완성!!!,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역사적 과업입니다.

23년 11월 2일 제31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환영행사에 참석한 필자, 김칠주 박사(좌측)와 강신철 부사령관.


국민희망저널 2023년 11월호 (제6호) 전문가 초대석 | 9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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