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국가유형과 베트남 피침의 현대사
20세기에 통일을 이룬 예가 3개 국가다. 흡수통일한 독일, 합의통일하였다가 무력통일한 예멘, 무력통일한 베트남이 그 예이다. 여기에서는 베트남의 무력 통일과정에 대해 알아보겠다.
베트남 현대의 역사는 피침과 항거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1858년 프랑스의 다낭 점령으로 시작된 식민 지배에 이어 1940년 9월에 태평양전쟁 시 일본군의 점령, 일본이 패망하였지만 승전국인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프랑스 연방국가라고 선언하여 프랑스와의 독립전쟁이 시작된다.
베트남은 1954년 프랑스와의 사이에 벌어진 제1차 베트남 전쟁, 1964년 미국 등 연합국과 싸운 제2차 베트남 전쟁, 1979년 중국과 싸운 전쟁 등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다. 그래서 베트남인들의 자부심은 크다.
제1차 베트남전쟁
(항불전쟁, 1946.12.19.~1954.8.1.)
베트남 독립전쟁(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프랑스식민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독립전쟁)은 1946년 12월 19일부터 1954년 8월 1일까지 프랑스와 베트남이 한 전쟁으로, 항불(抗佛)전쟁 등으로도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패전국 식민 국가는 독립했으나, 승전국인 프랑스는 식민정책을 포기하지 않자 호찌민은 프랑스를 상대로 베트남 독립전쟁을 시작하였다.
결국 1954년 프랑스군이 라오스와의 국경 부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하자 제네바 회담을 통해 전쟁은 종결되었다.
1954년 7월의 평화협정에서 합의된 내용은 북위 17도선을 따라 북은 호찌민 정부가 통치하고, 남은 프랑스가 세운 바오다이체제를 유지한다는 내용이었다. 프랑스의 패배였고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독립도 확약받았다.
여기에서 공산주의 핵심 세포 6,000여 명은 남베트남에 잔류하였는데 이들이 후에 베트콩으로 활약하는 근간이 되었다.
제2차 베트남전쟁
(항미 전쟁, 1955.11.1.~1973.4.30.)
제2차 베트남전쟁 또는 월남전쟁은 베트남에서는 항미(抗美)로도 부르며 1955년 11월 1일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분단된 남북 베트남의 내전임과 동시에 냉전시대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대립한 대리전쟁 양상을 띠었다.1964년 8월에 미국이 통킹만 사건으로 개입함으로써 국제전으로 확대되었고, 1965년에 미국, 대한민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이 지상군을 파병하였다. 이후 8년간의 전쟁 끝에 1973년 1월 27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남·북베트남, 베트콩4자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서 베트콩의 실체를 인정하게 되어, 미군철수 후의 남베트남에 두 개의 실체를 사실상 승인한 결과를 가져왔다. 협정대로 미군은 그해 3월 말까지 전부 철수하였다.
이 전쟁에 미군은 총 50만여 명을 파견하여 전사자 58,220명, 한국군은 총 32만 6천여 명이 참전하여 5,099명이 전사, 11,232명 부상, 4명이 실종되었다.
제3차 베트남전쟁
(해방전쟁, 1973.2.~1975.4.30.)
미국은 철수 후 남베트남에 대한 원조 규모를 크게 줄였고, 오일쇼크로 촉발된 경제위기 등으로 1974년 1월부터 남부지역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남베트남 정부 간의 갈등은 다시 무력 충돌로 확대되었다. 또한, 파리협정 후, 남북 베트남 당사자로 구성된 휴전 감시기구는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이에 북베트남은 1975년 3월 11일에 총공세 작전을 개시하였다. 결국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이로써 1955년 10월에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1901~1963)에 의해 건국된 ‘베트남 공화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1976년 7월 2일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라는 통일 정부가 수립되었다.
통일 후 국민통합 과정과 문제점
분단 국가가 통일되면 국민통합이 최우선 과제라 할 수 있다. 베트남 통일 정부가 추진한 국가통합과정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정치적 통합, 경제적 통합, 사회문화적 통합이 그것이다. 모두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정치적 통합이다. 우선 통일 정부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 사회주의 이념의 도입을 정당화하고 통합을 위한 정치제도의 개편, 이를 이해시키기 위해 대중을 동원하였다. 특히, 반정부 혹은 반체제 인사들, 즉 전직 미 군무원, 남베트남 첩보요원, 반정부 종교 지도자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였다.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교수진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동 기간 살해된 사람들의 수는 대략 65,000명으로 추정된다.
한편 1975년 이후 베트남 전역에 100여 곳의 정치범수용소가 설치되어 수용소당 2,000~4,000명의 정치범을 구금하였다. (강제수용 인원은 50만~ 100만 명으로 추산). 이러한 통일 정부의 잔학성을 피하고자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였는데 이른바 보트피플이 90만~110만여 명이 발생하여 해상으로 도피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통일 정부의 통합정책 추진 과정은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제도적 통합에서는 성공한 듯 보였으나 남부 주민들의 정신적 및 내면적인 통합을 달성한다는 실질적인 목표에 있어서는 실패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 경제통합 정책이다. 정부는 계획경제체제로 전환, 생산수단 국유화, 농민의 집단화 정책 등을 펼쳤다. 특히 인구 재배치 정책을 펼쳤다. 일차적인 대상은 재교육 받게 된 자들의 가족, 자본가와 상인, 중국계 베트남인, 소수종교 신자 등으로, 추정인원은 1975~1985년간 약 230만 명 정도이다. 이들 대부분은 전 정부 종사자의 격리, 과밀지역의 분산, 그리고 농촌 집단화를 위해 신경제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것으로, 이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모습이다.
그런데도 1980년대에 들어와 베트남경제가 초인플레이션, 대규모 재정적자 및 국제수지적자 등으로 극도로 혼란해지자 1986년에 신자유화경제정책인 도이머이(쇄신)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는 초기에 했던 부분적인 궤도수정이 아니라 경제운영체제의 근본적인 전환을 한 것으로 정치체제는 사회주의국가이면서 결국 경제체제는 시장경제체제로 전환된 것이다.
셋째, 사회문화적 통합이다. 남베트남 지역에 북베트남의 사회주의 가치관을 적용함으로써 베트남 사회의 가치통합을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사립학교를 공교육으로 전환, 사회주의 이념과 노동교육을 강조하고, 남부지역 언론을 폐쇄하고 외국방송 청취를 금지하였다. 여기에 테이프, 레코드, 출판물 등 자본주의 잔재를 제거하기 위해 문화반을 동 단위로 운영하여 감시하였다. 그러나 당과 정부 중심의 가치통합은 주민의 비협조를 불러왔고 북부지역 혹은 남부 프롤레타리아를 남부지역 관리자로 충원하여 남부지역 사회에 신 지배계층을 발생시켰으며, 사회주의 이념과 종교생활이 배치되어 가치통합이 어렵게 만들었으니 사회가치 통합과정은 일차적으로 실패하였다고 평가된다.
베트남 통일 교훈과 함의
베트남 통일은 전형적인 무력통일의 사례이다. 무력 통일 이후 사회통합 어려움, 공산주의 체제 아래 경제발전에 한계를 보여준 사례라고 본다. 흔히 베트남 학자들은 베트남식 사회주의를 “국가가 강하고 국민이 부유하며 사회가 공평하고 문화가 문명한 사회”라고 정의한다. 과연 그러할까? 아직도 공산주의 유토피아관에 사로잡힌 현실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한다.
베트남식 무력통일은 비교적 분단을 빨리 극복하고 통일 후 통치를 쉽게 하는데 유용한 수단이 될 수도 있겠으나 막대한 인명피해를 초래하고 무리한 통합으로 부작용이 많은 비인도적인 통일방법이다. 이러한 무력통일은 한반도 통일유형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으나 만일 북한이 도발한다면 반격하여 통일의 기회로 만들어야 하므로 이러한 통일방법도 반드시 대비해야 한다.
통일이 어떠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든 간에 그 후에 야기될 문제들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대비, 대응책을 하나씩 세워나가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민희망저널 2023년 8월호 (제3호) 전문가 초대석 | 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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