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적 요충지, 피침과 침탈의 역사
우리에게 아덴만 작전으로 익숙한 나라가 예멘이다. 예멘은 지리적으로 중동의 아라비아반도 남서부의 서아시아에 있는 국가로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의 길목에 있어 예로부터 문화적으로 풍부했다. 국토 면적은 약 55만㎢로 인구 2,800만 명, 국민의 38%가 절대빈곤에 처하였으며 실업률이 30%로서 아랍 국가 중 가장 가난한 국가이다.
남북 예멘 분리 독립
근세기 예멘은 수도 사나(Sanaa)가 중심이 된 북쪽은 1918년까지 오스만제국이, 항구도시 아덴(Aden)이 축이 되는 남쪽은 1967년까지 영국이 지배하였다. 북예멘은 1차 대전 후 1918년 독립하여 왕정국가로 출범하였으나 1962년 군사쿠데타에 의해 이슬람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의 정부로 전환되었다. 남예멘은 영국에 의해 계속 지배받다가 1967년 공산 혁명으로 사회주의 체제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분단국가가 되었다.
제1차 남북예멘 전쟁과 통일 협상(1972~1978)
1970년대 초 남북예멘은 상대 체제에 대한 무력 전복을 시도하여 2차례의 남북전쟁이 발발하였다. 1972년 9월 제1차 남북전쟁으로 국경에서 큰 충돌이 일어났다. 이후 아랍연맹의 중재로 1972년 10월 카이로에서 양국 총리 회담을 하여 남북예멘 지도자들은 “예멘아랍공화국과 예멘 인민민주주의공화국 양국 정부는 예멘 국민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존재한다.”라고 선언하여 통일국가수립에 합의하고 통일의 기본원칙, 통일국가의 성격, 통일 실현 방법 등을 결정하였다. 그해 11월에 트리폴리에서 양국 대통령이 만나 남예멘은 통일국가의 종교로 이슬람교를 택하는 것을 허용하는 대신 북예멘은 사회주의를 국가 이념으로 수용하는 것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종교 문제와 이념 문제로 합의 내용은 무효가 되었다.
제2차 남북예멘 전쟁과 통일 협상 (1979~1985)
1979년 제2차 남북전쟁으로 남북 간의 사태가 악화되자 아랍연맹이 적극 중재하여 1979년 3월의 쿠웨이트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남북예멘의 끊이지 않는 무력 충돌 문제를 해소할 방법이 통합에 있음에 합의하며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상 기간 남북예멘은 2차례 정상회담을 가졌고, 4차례 정상 간 최고 평의회를 열었으며, 17차례의 각료급 고위인사들이 교환 방문 회담을 개최하는 등 통일에 대한 논의가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제3차 협상과 합의통일 (1986~1990)
국내·외적인 환경이 통일에 유리한 상황으로 진전되면서 북예멘의 살레 대통령이 1989년 11월 남예멘의 수도 아덴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갖고, 1990년 5월 22일에 남·북 예멘의 통합을 선언하게 되었다. 당시의 인구, 경제면에서 북예멘이 남예멘에 비해 우위에 있었으나 북예멘의 살례 대통령의 양보와 결단으로 사회 체제와 군조직을 포함한 남·북의 기존체제 유지를 근간으로 한 1 : 1 대등 통합을 이루었다.
예멘의 통일 촉진 요인
통일을 촉진하게 된 요인은 첫째, 국내외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소련이 연방 해체를 앞두고 경제위기가 지속되자 고르바초프는 남예멘 지도자들에게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할 것을 권유하였다. 남예멘도 소련의 경제원조를 받는 게 어려워지자 서방 진영의 경제협력을 받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이에 사우디아라비아도 더 이상 개입의 명분이 사라져 남북통일 논의가 진행되었다. 둘째, 남북예멘 국경지대에서 석유가 발견된 것이다. 북예멘에 10억 배럴, 남예멘에 35억 배럴, 국경지대에 50억 배럴의 대량 매장량의 석유가 발견되면서 남북 경제 협력해야 통일될 수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통일을 낙관적으로 보게 되었다.1) 셋째, 남북 정치지도자들의 과단성 있는 결단이다. 북예멘의 살레 대통령은 원유가 발견되자 사우디에 대한 재정의존도가 낮아지면서 자신감이 생겨 적극적으로 통일을 추진하게 됐다. 남예멘도 대담하게 양보하면서 극적인 합의를 이루어 1990년 11월 30일자로 통합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6월 20일 아랍 정상회담에서 통일예멘의 높아진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6개월을 앞당겨 5월 22일에 통일을 선언했다.
1994년 북예멘이 남예멘을 무력으로 재통일
1990년 5월, 남북 합의에 따른 예멘공화국으로 통일되면서 북예멘이 남부를 흡수하는 방식이 되었다. 그러나 북예멘 출신이 대통령평의회 회원 5명 중 3명, 각료 39명 중 20명, 국회의원 270석 중 183석을 차지하자 남예멘 출신 정치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결국 사회문화적 통합을 위한 준비 부족으로 인한 종교적 갈등, 군사통합의 실패에 따른 무력 충돌의 발생, 특히 통합 이전의 남북예멘 병력 규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군의 직책 등을 대등하게 분배한 데서 발생한 집단 간 충돌, 분단 시기 동안 서로 이질적인 사회 체제를 유지해왔던 남북예멘이 무리한 정치통합 추진으로 군사 및 경찰, 행정 조직 등에 대한 실질적인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내전 발발이라는 재분단의 위기가 도출되었다.
1993년 8월에는 남예멘 지도자들이 정부의 권한 행사를 거부하여 더 이상 통일 정부로서 해야 할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결국 1994년 5월 21일 통일 4년 만에 남예멘이 분리 독립을 선언하면서 무력 충돌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무력 충돌은 북예멘이 일방적으로 승리하여 남예멘을 함락시킴으로써 내전 발발 2개월만인 1994년 7월 2일 남·북 예멘은 무력에 의한 재통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4년 6월 다시 발발한 내전은 중동의 맹주(盟主) 자리를 놓고 충돌해온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때문에 '국제전'으로 비화했다. 2023년 4월 종전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아직까지 종전되었다는 소식은 없는 상태이다.
예멘의 통일 교훈과 한반도통일에 주는 교훈
남북예멘의 통일은 대등한 합의 통합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정치, 사회, 문화, 군사 등의 각 부문에 있어서 갈등 요인을 충분히 해소하지 못한 채 성급한 통일 합의를 거쳐 통일을 이룬 예멘은 많은 부분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재분단의 위기를 거쳐 무력 재통합이라는 한계로 이어졌다. 실패한 예멘통일 요인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적 통합 분야에서 정치지도자들의 갈등과 분열이 있었다. 선통일 후통합을 추진했던 예멘의 정치통합은 남북예멘 정부의 지분을 1대1로 동등하게 분배하여 대등 비례 통합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남북 정치지도자들의 과감한 양보로 이루어졌으나 막상 통일되자 남북예멘의 지분이 북예멘에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되자 남예멘의 불만이 폭발하였다.
둘째, 군사통합의 미흡이다. 통일예멘의 헌법상 군 통수권자는 대통령평의회 의장이 주재하는 국방위원회였다. 과도정부 시절에는 대통령이 통합군 사령관을 겸직했다. 남예멘은 국방장관을, 북예멘은 총참모장을 맡기로 하고, 국방부와 통합군 사령부의 주요 요직은 남북예멘 출신에 50%씩 배분했다. 그런데 남예멘의 예멘사회당이 남예멘군에 대한 통제권을 놓지 않고 통일 이전의 지휘계통에 따랐다. 결국 남북예멘은 내전 상태에 이르게 된다. 군사 통합 없이 통을 추진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셋째, 경제통합의 실패이다. 남예멘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양질의 관료, 그리고 북예멘의 풍부한 노동력과 기업가적 경험과 정신력이 결합한 시너지 효과가 나오면 예멘경제는 급속히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통일 당시 경제는 낙관적이었다. 그러나 1990년 8월에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이라크와 쿠웨이트 양국 간에 예멘의 입지가 곤란하게 되었다. 이라크는 예멘의 전통적인 동맹국이고 쿠웨이트 또한 남북예멘 사이에 무력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중재에 나서주고 경제적 지원을 해주었던 아주 가까운 국가였다. 그런데 예멘은 이라크를 제재하는 유엔 결의안의 표결에서 기권표를 던져외교적으로 고립되면서 경제제재로 경제가 난관에 봉착되었다. 걸프전이라는 변수에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넷째, 사회통합 실패이다. 통일 후 이슬람 정신이 사회통합의 기준이 되자 북예멘에서는 1부4처제, 여권 제한, 남예멘은 일부일처제, 여권신장이 부딪혀 여권 문제가 사회문제가 되었다. 정당도 38개가 등록되어 혼란 정국이 되었다. 여기에 남부 예멘에서는 부족 간의 분열과 대립이 심화하였다. 여기에 시장경제체제가 도입되었으나 준법정신 부족 등으로 부정부패가 확산하여 분열과 갈등은 심화되었다.
예멘은 무력에 의한 재통일을 하였지만, 베트남과는 다르게 일차적으로 합의 통일을 달성하였다가, 다시 내전을 거쳐 이루었다. 결국 예멘도 베트남과 같이 무력을 통하여 강제적으로 통일된 사례로 볼 수 있다. 예멘이 최초 합의로 통일한 후에도 무력 충돌을 겪게 된 원인은 남·북 예멘 정치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만을 우선시하여 우선 통일은 달성했지만, 서로 상대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갈등을 대화로 풀어 정치적 통합을 달성하는 데에 실패했고, 경제적·사회문화적·군사적 통합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예멘은 50대 50이라는 절대적 대등 통합을 이루었으나 통일의 취약성이 내재하였다. 지도자의 결단으로 통일을 이루었으나 결국 국민적 합의가 부족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통일은 사회통합에 한계가 있음을 교훈 삼아 우리는 남북통일을 준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국민희망저널 2023년 9월호 (제4호) 전문가 초대석 | 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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