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헌법은 통일의 내용, 방법, 목표 등을 비교적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자유민주적 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을 추구한다”라고 명시한 헌법 제4조는 통일의 내용과 관련해서 헌법이 지향하는 핵심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가 구현되는 통일을 해야 함을 명령하고 있으며, 방법에 관해서는 무력통일이 아닌 평화통일이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라고 명시한 헌법 제3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천명한 헌법 제10조, 인간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행복 추구권과 인권을 보장한 헌법 제37 등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이 보장된 통일된 한반도’가 통일의 궁극 목표임을 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해 어떤 통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또한, 우리 법체계에 ‘남북교류협력법’과 ‘국가보안법’이 공존하는 것은 북한이 우선적 교류협력 대상인 주권적 실체이자 대한민국의 생존과 국민의 안녕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이중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는 통일 이전까지는 평화로운 상생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대상이지만 동시에 대한민국의 생존과 안전을 위협하는 실체이므로 튼튼한 안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기도 하다. 1991년 유엔이 한국과 북한이 회원국으로 받아들인 것은 국제사회가 북한을 사실상의 주권적 실체로 인정한 조치였다. 헌법 제66조는 대통령의 책무를 ‘국가의 독립과 영토의 보전 그리고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 수호’로 정하고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대통령과 정부가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질서를 수호하면서 대북정책과 통일을 추진해야 함을 명령하고 있다.
이렇듯 헌법과 법이 통일과 대북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반드시 수호해야 할 핵심 가치와 그것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전제들을 비교적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통일담론은 왜곡과 혼란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 과정에서 무수한 궤변들이 양산되었다. 일부 정치인들과 사회활동가들은 고의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이 궤변들을 정론인 양 확산시켜 왔고, 좌 성향 정부들은 이들과 궤를 같이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 결과는 심각하다. 많은 국민이 통일전략과 대북정책을 구분하지 못하고 상생과 통일을 동일시 하며, 안보와 상생 그리고 안보와 통일을 상호 상충적인 것으로 오해한다. 정론으로 포장된 궤변들이 당면 목표인 남북 상생과 미래 목표인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오히려 위태롭게 하는 흉기가 되고 있지만,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통일정론을 배울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이렇듯 통일 관련 궤변들이 ‘안방’을 차지하게 된 데에는 자연발생적인 요인들이 없지 않으나, 집요한 이념적 목표를 가진 특정 세력들의 고의적 프레이밍에 의해 초래된 부분도 많다. 그래서, 헌법이 명령하는 핵심적 가치와 법 취지에 따라 통일정론을 재정립하고 통일전략과 대북정책을 정확하게 구분·시행하는 것과 자라나는 세대들이 통일정론을 배우는 교육환경을 만드는 것이 한국의 시급한 정책과제가 되고 있다.
통일정론과 통일궤변
전술한 바와 같이 헌법 제4조는 통일의 내용을 ‘자유민주주의 통일’로 제한하고 있어 북한이 주장했던 연방제 통일은 물론 1 국가 내 2 체제의 혼재를 의미하는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도 분명한 위헌이다. 또한, 헌법 제4조는 통일의 방법을 ‘평화통일’로 제한하고 있어 전쟁이나 무력행사를 통한 강제 통일도 위헌이다. 헌법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통일 이전이나 이후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이 지켜야 하는 이념이자 핵심적 가치로 천명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헌법 제4조는 어떤 경우에도 자유민주주의를 희생하는 통일을 해서는 안 됨을 명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일부 세력들은 ‘평화통일’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방법이 평화적이기만 하면 어떤 내용의 통일이라도 무방하다는 식의 분위기를 조성·확산시켰으며, 그것이 위헌적인 통일궤변들을 양산하는 기저 논리로 작동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한국에는 “남북이 평화롭게 상생하는 것이 통일의 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있지만, 이는 정론이 아니다. 즉, 평화로운 상생은 어떤 정부하에서든 추구해야 하는 대북정책의 당면 목표이지만 그것이 곧 자유민주주의 통일로 가는 길이 되지는 않는다. 남북이 평화롭게 상생하기 위해서는 북한 내 모든 결정권을 독점하는 북한 정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 정권의 권위와 북한의 주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이 제공하는 대북 지원이나 교류협력이 ‘자유민주’ 통일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북한 주민들을 일깨우는 계몽 효과를 발휘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 정권에게 배분권을 위임하지 않고 직접 북한 주민과 접촉하는 지원이나 교류협력이어야 한다. 하지만, 항시적으로 체제 불안을 느끼는 북한 정권은 그런 방식의 교류협력을 한사코 거부하고 ‘자본주의적 오염’을 방지하는 ‘모기장 전략’을 구사해 왔으며, 북한의 이런 체제 강박증은 1990년 독일통일 이후 더욱 극심해졌다.
따라서 현 남북한 상황에서 교류협력은 북한 정권의 입맛에 맞는, 즉 북한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방법으로만 가능하며,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시 “남조선 대통령이 장군님을 알현했다”라고 선전하고 대한적십자가 보낸 지원품이 ‘수령님이 내려주시는 하사품’으로 둔갑하는 식의 남북교류는 남북 상생을 위해 필요하지만, 헌법이 명령한 ‘자유민주’ 통일에 기여하지는 않는다. 그런 교류협력은 평양 정권의 권위와 정통성을 높여 현 체제하에서의 분단 고착에 기여하는 바가 더 크며, 굳이 통일에 기여한다고 주장하려면 ‘자유민주’ 통일이 아닌 ‘주체 통일’에 기여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에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나 종북 인사들은 ‘퍼주기’식 대북 양보나 조건 없는 지원을 ‘평화통일로 가는 남북 상생’ 노력으로 정당화하고 있으며, 스스로를 ‘통일 역군’으로 자칭한다. 2014년 북한 노선을 추정한다는 이유로 헌법재판소가 통진당 해산을 선고했을 때 당시 통진당 책임자는 “박근혜 정권이 통일의 뿌리를 자르고 있다”라고 외쳤고, 북한 노선에 추종하여 유사시 한국 내 주요시설들을 파괴하는 반국가 계획을 논의한 혐의로 구속된 모 정치인도 “정부가 통일 역군을 가두려고 한다”고 주장했으며, 국내와 미국 전역을 돌면서 친북적 강연을 했던 모 여성 활동가는 자신의 행사를 ‘통일컨서트’로 칭했다. 북한 정권과의 화친을 강화하는 것을 ‘통일운동’이라고 한 것이다. 당연히 틀린 말이다. “일단 무력 충돌을 피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데 필요한 활동”이라고 말해야 틀리지 않는다. 요컨대, 이 부분에서는 “자유민주 통일과 남북 상생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내닫는 두 마리의 토끼”가 정론이며, 한국은 힘들지만 이 두 마리 토끼 모두를 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남북이 사이좋게 지내 통일을 앞당깁시다”라는 것은 남북 대표가 회담장에서 덕담으로 나눌 수 있는 말이지만 통일정론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함께 통일 노래를 부르거나 통일헌장을 만들기 위해 대화하는 것도 화해협력에 기여하는 외교적 절차일 수 있어도 자유민주 통일과 관련해서는 ‘부질없는 메아리’일 뿐이다. 주체 통일에 충성하는 북한 대표들과 자유민주 통일을 해야 하는 남한 대표들이 만나서 만들어 낼 수 있는 통일헌장은 없다.
“흡수통일은 나쁜 통일”이라는 주장도 정론이 아니다. ‘자유민주 통일’과 ‘평화적 통일’을 명시한 헌법 제4조에 부합하는 통일은 합의 통일이지만, 가능한 합의 통일은 어느 한쪽의 체제 붕괴했을 때만 가능하다. 하지만, 합의에 의한 자유민주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이 자신의 체제를 포기해야 가능한데,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결국, 헌법 제4조에 부합하는 통일은 북한 체제의 붕괴로 인한 흡수통일뿐이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흡수통일’은 금기어가 되었다. 그래서 국가 정보기관들이 흡수통일 기회가 왔을 때 신속하고 평화롭게 통일을 거머잡을 수 있는 계획과 자료를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축적해 나가는 것이 매우 필요한 업무이지만, 한국에서는 정부가 바뀌면 ‘내 사람 심기’ 바람이 불면서 이런 업무에 종사한 직원들을 졸지에 ‘반통일 수구’가 되어 청산 대상이 되어버린다. 자고로 정보기관이란 정부의 교체나 정권의 부침과 무관하게 고도의 전문성과 무서운 일관성을 가지고 국가 백년대계를 준비해 나가야 하는 기관이다. 이것이 담보되지 않으면 정보기관은 ‘예산 먹는 하마’로 전락하고 만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는 흡수통일을 거론하면 북한을 자극하여 남북 상생을 파괴하여 평화통일을 가로막는 ‘반통일론자’로 매도되기 십상이며, 국회에 불려 나가 ‘평화 파괴자’ 또는 ‘통일 파괴자’로 추궁을 받을 수 있다.
‘자유민주’라는 내용론보다는 ‘평화적’이라는 방법론이 통일담론을 압도하는 가운데 등장한 궤변들은 그 말고도 많다. 예를 들어, 궤변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안보를 강화하면 북한을 자극하여 남북관계가 경직되어 평화로운 상생이 어려워지고 그래서 평화통일을 저해하게 된다”는 논리가 정론이다. 그러나, 안보 역량이 약한 나라가 자신들의 체제로 안보 역량이 큰 나라를 흡수하여 통일한 사례는 없다. 한반도에서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북한이 스스로의 체제를 포기하겠다고 합의해야 하는데, 이는 핵무장까지 한 북한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는 “튼튼한 안보는 자유민주 평화적 통일의 밑거름”이 정론일 수밖에 없다. 즉, 헌법이 명령하는 ‘자유민주적 질서’를 중심에 놓고 볼 때 ‘안보와 통일’은 상호상충적인 것이 아니라 함께 굴러가는 동전의 양면이다. 반대로, 통일을 운위하면서 안보를 경시하고 북한 정권 비위 맞추기에 연연하는 정책은 ‘자유민주주의’를 핵심적 가치로 천명한 헌법 4조는 물론 ‘영토의 보전과 국가의 계속성’을 대통령의 의무로 규정한 헌법 66조까지 어기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한국에는 “군사력을 강화하면 평화통일이 저해된다”라는 궤변을 정론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북핵이 당장의 국가안보를 위협함은 물론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저해하는 궁극적인 장애물임을 지적하고 이에 대처하는 안보 역량을 주문하는 전문가들을 ‘극우’로 내몬다.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한반도 전체와 부속 도서를 영토로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3조를 들먹이면서 “북한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하더라도 한국의 국경선을 침범한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보고 싶은 쪽만 바라보는 ‘외눈박이’가 아니라면, 즉 헌법이 당면한 현실과 미래의 지향점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는 점과 법체계가 북한이 교류협력의 대상 겸 주요 위협원이라는 이중적 존재라는 사실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이런 주장을 하기는 어렵다. 이 부분에서는 “남북대화와 안보는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함께 굴러가야 하는 것이며, 튼튼한 안보를 바탕으로 남북대화를 추진해야 한다”가 정론이다.
“군사력을 강화하면 남북 간 상생이 저해된다”는 부분도 단기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궤변이다. 체제경쟁을 벌이는 두 나라 중에 어나 한쪽의 안보 역량이 다른 쪽을 압도하는 경우 강한 나라는 약한 나라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상생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국제정치의 기본 원리다. 한반도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북한이 불변의 공세적 대남목표들을 가진 공자(攻者)이고 한국은 그들의 늘 도발을 경계해야 하는 영원한 방자(防者)인 한반도에서는 북한의 압도적 안보 역량을 방치하면 남북관계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관계를 뜻하는 우낭(牛狼) 관계로 전락하고 북한이 남북관계를 지배하게 된다. 어쩌면 이미 그런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는 굴종과 아부는 필요하겠지만 진정한 교류협력은 존재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이 안보 역량을 강화하여 북한이 대남도발을 통해서는 얻을 것이 없으므로 상생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할 때 상호존중 하에서의 교류협력과 항구적인 상생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장기적으로는 “튼튼한 안보가 상생을 해친다”는 궤변이며 “튼튼한 안보는 안정적·항구적 상생을 위한 전제”가 정론이다.
대북정책과 통일전략
물론, “상생 길과 통일은 길은 서로 다르다,” “헌법에 부응하는 평화적 합의통일은 흡수통일뿐이다” 등이 정론이라고 하더라도, 평화적 상생 노력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흡수통일을 한답시고 대놓고 북한 체제를 와해시키는 활동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통일이 실현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의 목표인 데 반해 상생이란 현재의 목표이며, 현재의 목표가 미래의 목표보다 덜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때문에 한국은 평화로운 상생을 위해 대북정책을 펼치는 것이며, 이 차원에서 때로는 북한에 대해 양보적인 조치와 지원을 마다하지 않아야 하고 북한을 주권적 실체로 인정하고 교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흡수통일’을 외치면서 공개적으로 북한 체제 와해 활동을 벌이는 것은 상생을 저해하는 자극 요인이 된다. 그래서 대북정책은 공개적으로 수립·실행해야 하는 ‘정책’이지만, 통일은 공개할 것과 공개하지 않아야 할 것들이 혼재하는 ‘전략’일 수밖에 없다. 즉, 평화적 자유민주 흡수통일을 끌어내기 위해 북한 체제의 붕괴를 과격하게 추진하면 북한의 체제 불안감을 자극하여 전쟁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흡수통일을 위해서는 ‘소극적으로 보이는 적극적인 대비’가 필요하다. 과거 서독이 ‘통일’이나 ‘흡수’를 입에 올리지도 않는 가운데서도 동독의 내부 변화를 통일의 기회로 삼는 데 성공했듯이 한국도 북한의 변화를 끌어내는 노력을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추진해야 하며, 북한 내부에서 변화의 불길이 일어날 때는 이를 놓치지 않고 통일을 견인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는데 더 큰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 과거 박근혜 정부가 ‘통일대박론’을 외치면서 북한에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제안했을 때 북한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로 일축했었다. 그것이 북한 체제의 소멸과 흡수통일을 전제하는 통일대박론과 남북이 서로 믿고 교류 협력하자는 대북정책을 한꺼번에 제안한 한국 정부를 향해 북한이 쏟아낸 비난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오랫동안 ‘통일정책’ 대신 ‘통일전략’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과 국정원과 같은 기관이 통일전략의 관장하는 주무 부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같은 취지에서 통일부를 ‘대외협력부’로 개칭하든지 아니면 남북교류 업무를 담당하되 동시에 통일전력 관련 업무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과거 여러 정부 동안 통일부는 남북교류 업무를 담당하는 부처로만 인식되어 왔고, 지금도 통일교육원은 공무원들을 불러서 남북 간 교류협력을 가르치면서 ‘통일교육’이라고 부르고 있다. 좌 성향 정부 동안에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는 상생을 논하면서 ‘통일’을 운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북 상생이 곧 평화통일의 길”이라는 궤변이 확산하는 데 이바지해 왔다. ‘통일부’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헌법에 부합하는 통일 업무를 수행토록 하면 되지 않느냐는 반문도 가능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통일 업무에는 비공개 전략으로 접근해야 하는 업무들도 많으므로 쉽지 않다. 사실, 이명박 정부 출범 때 통일부 개칭 문제가 인수위에서 살짝 논의된 적이 있었지만, ‘통일’이라는 명칭 자체가 내려놓기 어려운 정치적 자산이어서 그 또한 쉽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런 가운데서 윤석열 정부 이후 통일부가 ‘대북 퍼주기’를 통일부 업무의 전부로 인식했던 과거와는 달리 통일에 담아내야 하는 헌법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 북한 인권 등 통일전략과 관련한 사안들에 관심을 보이고 있음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인권은 통일의 수단이자 목적이며 출발점이자 귀결점
“인권을 거론하면 북한을 자극하여 상생과 통일을 저해한다”라는 주장도 정론이 아닌 궤변이며,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 추구권을 천명한 헌법 제10조와 37조를 정면으로 위배한다. 남북 상생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 불필요하게 북한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지만, 인권 문제는 그 부류에 속하기에는 너무나 특별한 예외적 사안이다. 인권은 좌우, 보혁, 세대, 시대, 지역 등을 초월한 절대적인 인류 보편적 가치이며, 북한은 세계 최악의 인권 후진국이다.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등 국제단체들이 정기적으로 북한 인권을 규탄하고 미국, 일본, 유럽의회(EU) 등 많은 나라들이 북한인권법을 제정했으며, 2014년에는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가 북한의 최고 통치권자를 인권 가해자로 지목하고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할 것을 권고하고 국제사회의 보호책임(R2P) 이행을 촉구했다. ‘보호책임’이란 코피 아난(Kofi Annan) 제7대 유엔 사무총장이 주창하여 2005년 유엔이 채택한 개념으로 개별국가의 주권을 초월한 국제사회의 인권 개입을 정당화한다. 즉, 국민의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가 반대로 자국민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면 안보리 결의를 통해 국제사회가 개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며, 실제로 2011년 유엔은 보호책임을 명분으로 2011년 리비아 내전에 개입했다. 이렇듯 오늘날 인권은 국경을 초월하는 절대적·보편적 가치로 인정되고 있지만 평양 정권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며, 체제 불안이 심해질수록 주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통제도 극심해지고 있다.
남북이 대치하는 한반도에서는 인권이 더욱 많은 의의를 가진다. 한국의 인권 카드는 북한만이 핵을 보유한 핵비대칭을 견제하는 역비대칭 수단이며, 북한의 남북관계 지배를 저지하는 한국의 지렛대다. 인권은 계몽 효과가 가장 큰 수단으로서 북한에 자유민주주의를 주입해 헌법이 명시한 자유민주적 질서에 입각한 통일을 가능하게 하며, 통일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인권이 구현된 하나 된 한반도’일 것이다. 요컨대, 인권은 남북관계에서 한국만이 사용할 수 있는 역비대칭 수단이고, 통일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이며 알파이자 오메가이며, 헌법 제10조와 37조가 제시하는 통일정론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대북 인권 정책은 정부가 바뀔 때마다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고, 좌 성향 정부 동안은 인권 문제를 외면하다시피 했다. 2016년 우여곡절 끝에 ‘북한인권법’을 제정했으나 특정 정치세력의 반대로 법 집행의 핵심인 북한인권재단은 출범조차 하지 못한 상태다. 이렇듯, 인권 문제가 한국 정부의 대북 카드로 정착되지 못한 근저에는 “북한 인권을 거론하면 남북관계가 험악해지고 평화통일이 저해된다”라는 정당화 논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즉, 궤변이 정론을 밀쳐낸 상태에서 헌법이 강조하는 핵심적 가치들은 외면당하고 있다.
‘자유민주적 질서’를 수호해야 하는 이유
‘통일’ 이외에도 ‘민주,’ ‘정의,’ ‘평등’ 등은 오늘날 심하게 오남용되고 있는 표현들이다. 이 용어들을 둘러싼 이념 세력 간의 프레이밍 전쟁은 지금도 진행형이지만, ‘통일’과 마찬가지로 헌법에 기초한 정론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고의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왜곡된 궤변들이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편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좌우간 프레이밍 전쟁에서 좌파가 일방적 승리를 거둔 것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많다. ‘정의’와 관련해서는 내가 하는 것은 정의이고 반대편이 하는 것은 모두 불의로 간주하는 ‘내로남불’이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공정한 경쟁의 결과로 나타나는 차이를 죄악시하고 시장경제 질서를 부인하는데 ‘평등’을 애용해 왔다. 특히 ‘민주’는 시대별 여건에 따라 다양한 가치들을 대변해 왔다. 서구에서 ‘민주적 질서’가 파시스트 정권을 탄생시키거나 파시스트 권력의 재현을 배제하는 이념적 도구가 되기도 하다가 어느 순간 공산주의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의 지도 이념이나 종교적 극단주의에 대치되는 정치적 가치가 되기도 했듯, 한국에서도 ‘민주’는 독재자를 끌어내리거나 권력을 연장하기 위한 이념적 도구가 되기도 했으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반공 이념이 되거나 정치체제의 변혁을 추구하는 혁명가의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다양한 사회세력들이 제각기 아전인수식 의미를 ‘민주’에 부여했으며, 오늘날 정통적인 헌법학자들에서부터 운동권 인사나 친북주의자들까지 모두가 스스로를 ‘민주세력’로 자칭한다. 국제적으로도 그렇다. ‘인민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식으로 편리한 접두사와 함께 사용하면서 저마다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언어 도구가 되어 왔으며, 최악의 인권 부재국인 북한도 스스로를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으로 칭한다. 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가치상대주의,’ ‘가치다원주의’ 등의 알 듯 말 듯 한 표현으로 무탈하게 포용하려 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 앞에 ‘자유’라는 표현이 첨가되는 순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나 북한의 수령론과는 결코 상종할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 반독재주의, 반권위주의, 언론의 자유, 사유재산 제도, 시장경제 질서 등 서구식 민주주의의 제요소들을 분명하게 대변한다. 즉, 한국에서 ‘자유’는 프레임잉 전쟁에서 살아남아 본래의 의미를 비교적 온전하게 지키고 있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과거 정부가 헌법 제4조의 ‘자유민주적 질서’에서 ‘자유’를 삭제하는 개헌을 시도했던 이유도 명확해진다. ‘자유’가 삭제되면 다양한 의미 부여가 가능한 ‘민주’만 남게 되므로 통일의 내용과 관련한 헌법의 제약이 느슨해지고 ‘평화적이기만 하면 된다’는 방법론이 더욱 영향력을 키울 것이며, 어떤 통일이든 무방하다는 좌파적 주장들이 더욱 힘을 받을 것이다. ‘자유민주적 질서’라는 헌법이 명시한 핵심적 전제조건이 약화되면서 ‘상생이 곧 통일이다,’ ‘안보를 강화하면 평화통일이 저해된다,’ ’흡수통일은 나쁜 통일이다,’ ’대북 인권 공세는 남북관계를 해치고 통일을 저해한다’ 등의 통일궤변들이 더욱 설득력을 발휘하게 됨도 당연하다.
그 연장선에서 ’낮은 단계 연방제’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은 위헌 부담을 상당히 들어낼 수 있다. 낮은 단계 연방제란 하나의 국호를 사용하는 통일국가 형태를 갖추되 남과 북이 현 체제를 유지하는 통일을 말한다. 이는 당연히 현행 헌법 4조를 위배하는 것이며, 설령 그런 통일을 하더라도 현실성이 없고 위험성도 매우 크다.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결성한 ’통일아랍공화국(UAR), 1972년 이집트, 시리아 그리고 리비아가 결성한 아랍공화국연방(ARF), 1990년 남북 예멘 합의통일 등이 수년 후 모두 해체된 사례에서 보듯 국가 목표, 종교, 언어 등이 같거나 비슷한 국가 간의 합의통일도 성공하기 어렵다. 하물며 제로섬 경쟁 관계에 있는 남과 북의 체제가 한 지붕 아래 공존한다면 한국이 외국과 맺고 있는 동맹이 유명무실해짐은 물론 다양한 의견과 세력이 경쟁하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북한의 집요한 와해 공작에 시달리게 될 것이며, 북한이 무력 침공을 감행하더라도 ‘내전’이 되어 외부의 개입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북한은 연방제 통일을 주체통일로 가는 중간 정거장으로 보고 1973년부터 ‘고려연방제’를 주장하다가 2000년 6·15 남북공동성명에 연방제를 살짝 완화한 “낮은 단계 연방제를 추진한다”라는 내용을 포함했다. 이렇듯 ‘자유민주적 질서’를 핵심적 가치로 천명한 헌법을 수호해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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