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베트남전 파병 60주년, 보훈과 호국을 생각한다

호국보훈의 달 특별기고 | 김형철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원장

베트남전은 한국군 32만 명이 참전하여 5,000여 명의 전사자, 1만여 명의 부상자 그리고 14만 명이 넘는 고엽제 피해자를 양산한 참혹한 전쟁이었다. 파병 60주년을 맞아 베트남전 참전의 의미와 상흔을 헤아려 본다.

김민경 승인 2024.06.20 15:15 | 최종 수정 2024.06.24 17:22 의견 0
베트남에서 돌아온 청룡부대 귀국행사 ⓒ전쟁기념관 자료제공


건국 이래 대한민국은 두 차례의 전쟁을 치렀고, 그 전쟁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쓰러져갔다. 첫 번째는 북한의 불법 남침에 의한 3년간의 6·25 전쟁이었다. 그로 인해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우리 군인과 민간인은 물론 유엔군으로 참전한 전 세계 자유 국가의 젊은이들도 피를 흘렸다. 두 번째는 6·25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젊은이들이 또다시 총을 들고 공산주의와 맞서야 했던 베트남전이었다. 본고는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이 올바른 결정이었는지 또는 정의로운 전쟁이었는지를 따지기 위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필자는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 60주년을 맞이하여 32만 명이 참전하여 5,000여 명의 전사자, 1만여 명의 부상자 그리고 14만 명이 넘는 고엽제 피해자를 양산한 베트남전 참전의 의미와 상흔을 헤아려 보려고 한다.

우리는 불과 79년 전까지만 해도 나라를 잃은 슬픈 국민이었다. 학생들은 일본말을 배워야 했고 조선인들은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면서 종군 위안부나 징용 노동자로 끌려가야 했다. 그래서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배웠지만, 오늘날 그 배움의 흔적이 이 땅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국가의 명으로 파병되어 핏발 선 눈으로 사방을 주시하고 부스럭 소리에도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했던 젊은이들에 대한 공감은 사라지고, 그들의 희생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부질없는 일탈로 치부하거나, 더 나아가 민간인을 학살한 범죄자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방치하는 것은 보훈을 외면하는 것이다. 보훈이 사라지면 호국도 없어질 것이다.

디엔칸 촌락작전 중 아이들을 구출하는 국군

‘민간인 학살’ 근거 없는 오명 씌워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 8개월에 걸친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은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위한 원동력이었다. 5,000년 가난에 찌든 국민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느끼게 해주었고,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로 시작하는 가수 김추자 씨의 노래는 국민을 깨우는 기상나팔이었다. 비록 남베트남이 패전하여 참전의 의미가 다소 퇴색되기는 했지만, 참전 군인들은 자신들의 참전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긍지를 안고 살아왔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그 긍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적화된 통일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에 관한 연구로 1992년 학위를 취득한 한국 여성 K 씨는 베트남군 정치총국 산하 연구소에서 작성한 ‘남베트남에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이라는 보고서를 입수하여 1999년 국내의 H 언론사에 기고했다. 음해의 시작이었다. 이후 K 씨가 설립한 한·베트남 평화재단, H 언론사 및 일단의 진보성향 학자와 변호사 등은 원팀을 이루어 ‘진상규명’을 앞세우면서 집요하게 민간인 학살 사건을 찾아다녔다. 그것은 한국 정부와 베트남 정부는 물론 양국 국민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었고 참전 군인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의 퐁니 마을 민간인 70여 명이 한국군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당시 가족을 잃고 자신도 총상을 입었다고 주장하는 베트남인 응우옌 티탄 씨를 원고로 내세워 2020년 4월 한국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2023년 2월 서울중앙지법 민사 68부는 “한국 정부는 원고에게 3,000만 100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한국 정부가 불복하여 항소함으로써 현재 2심이 진행 중이지만, 만일 1심 판결이 최종 확정된다면 유사한 피해를 주장하는 베트남인 9,000명 이상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으며, 다른 미확인 사건들에도 파장이 미칠 것이다. 예를 들어, K 씨는 1968년 10월 남베트남 남부 판랑 지역의 사찰 ‘린선사’에서 한국 군인들이 스님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다는 ‘인민군대지’ 기사를 1999년 H 언론사에 제보했고, H 사는 이를 보도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국과 남베트남을 이간하기 위하여 베트콩이 남베트남 민간인을 살해한 후 한국군이 살해한 것으로 조작한 것임이 1970년 남베트남 정부군에 체포된 베트콩에 의해 밝혀졌다. 이처럼 K 씨는 충분한 확인을 거치지 않은 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자료를 무차별적으로 제보하였고, H 언론사는 이를 여과 없이 보도하였다. 비슷한 사례들은 빈안사 고자이 마을, 턴지앙촌, 하미마을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베트남의 곳곳에는 한국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베트남인들의 이름이 새겨진 위령비가 세워져 있지만, 그 명단도 위령비도 모두 적화 통일된 이후 만들어진 것으로, ‘피살자’ 명단에는 당연히 전사한 베트콩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베트남 평화재단은 한국 관광객을 모집하여 위령비에 참배하게 함으로써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기정사실로 하면서 한국 국민에게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을 학살범으로 세뇌하고 있다. 20대와 21대 국회에서는 특정 정당이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피해 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을 발의했다가 참전용사들의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고,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모의 시민평화법정’이 열리기도 했으며, 민간인 학살을 주제로 한 연극・영화 등 예술문화 작품들이 유포되고 있다.

태풍 5호 작전 중 부상병 응급처치하는 맹호 26연대 병사들 (1989년 유남균 기증사진) ⓒ전쟁기념관 자료제공

1968년 북한의 대남 도발과 베트콩의 구정 공세

1964년 한국이 베트남 파병을 결정하자 북한은 이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자신들도 북베트남을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북한의 대남 도발은 1968년에 최고조에 달했는데, 1968년 1월 21일 124군 부대 특전 요원을 남파하여 청와대 가습을 시도했고, 이틀 후인 23일에는 동해에서 미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했으며, 11월에는 울진·삼척에 120명의 무장 공비를 남파하여 우리 국민을 살상했다. 북한은 북베트남에 심리전 요원을 파병하여 한국군과 남베트남군 간 이간을 획책한 것도 확인되었다. 북한의 심리전 요원들은 1973년 한국군이 철수한 후에도 베트남에 남아 한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거짓 증거들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K 씨가 수집하여 H 언론사에 제보한 자료 중에는 북한의 심리전 요원들에 의해 기획·조작된 것들이 포함되었을 개연성이 크지만, K 씨가 그것을 구분·확인할 능력이나 의지를 가졌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1968년은 또한 베트남전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환점이었다. 베트콩은 구정 기간 휴전협정을 어기고 도처에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이른바 구정 공세였다. 북베트남군의 가세가 지연되면서 군사작전으로서의 구정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시를 장악하는 데에도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작전에서 베트콩은 병력의 절반 정도인 4만 5,000명을 잃었는데, 특히 전투 경험이 많은 간부급의 피해가 커서 베트콩 조직의 상당 부분이 궤멸했다. 그런데도 구정 공세는 북베트남에 정치적·전략적으로 커다란 승리를 안겨준 작전이 되었다. 베트콩 특공대가 사이공의 미 대사관을 습격하여 미 해병대 경비 병력을 사살하는 장면이 CNN을 통해 미국 가정에 전해짐으로써 미국 내 반전 여론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찾아내기에 여념이 없는 K 씨와 한국 H 언론사는 휴전협정을 위반하고 구정 공세를 일으켜 미국 대사관 직원 및 가족들과 미군을 무참히 학살한 베트콩의 잔학한 행위에 대해서는 일절 말이 없고, 국가의 명을 받아 낯선 이국땅 정글에서 적의 기습으로 숨져간 우리 젊은이들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승룡 19호 작전 중 적진으로 진격하는 청룡부대 병사들(1989년 유남균 기증사진) ⓒ전쟁기념관 자료제공

다른 나라는 참전 군인을 어떻게 예우하나?

전사(戰史)에서 드러난 각국의 전쟁 관련 판결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전쟁에서 민간인의 희생은 불가피하게 발생하지만, 민간인 학살을 문제 삼아 개인이 상대국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고의성’이 입증된 대량 학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또한, 많은 나라는 자국군을 범죄자로 규정하는 판결을 극도로 꺼리며, 특히 범죄 행위를 증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피해 호소인’들의 주장만을 받아들여 판결하는 판사는 거의 없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라는 대도시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일본의 전쟁 의지를 꺾기 위한 고의적인 대량 살상이었지만, 일본인 개인이 미국 정부에 배상을 청구한 적은 없었고 가능하지도 않았다.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국가 대 국가’ 차원에서 배상이 이루어지거나, 국제 군사재판을 통해서 해결하였다. 베트남전쟁 중 1968년 3월 민간인 347~504명이 학살된 ‘말라이 마을 사건’에 연루된 미군은 26명이었지만, 그중 윌리엄 캘리 중위만이 유죄로 인정되어 종신형 판결을 받았다. 그 후 캘리 중위는 두 차례 감형을 받고 3년 반 동안의 가택연금 후 사면되었다. 이런 사례들에 비추어 보면, 적화 통일된 베트남에서 작성된 자료 또는 북한의 심리전 요원들에 의해 조작되었을 수도 있는 현지 자료를 토대로 한국인이 한국군을 학살범으로 내몰고 베트남인을 원고로 내세워 한국 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M60 기관총을 쏘는 한국군 (1990년 임일수 기증사진) ⓒ전쟁기념관 자료제공

보훈이 있어야 호국이 있다

미국은 베트남전 참전 50주년이 되던 시점에 공식적으로 참전 군인을 국가의 영웅으로 선포했다. 2012년 5월 현충일을 맞아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워싱턴 D.C.의 베트남전 참전비를 찾아 “우리 역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기는 베트남전쟁 시기였다. 우리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 그들이 귀국했을 때 그들을 환영해야 했음에도 오히려 비난한 것은 국가적 수치였다”라고 연설했다. 참전 결정은 정치인의 몫이지만, 희생은 참전 군인들이 짊어진다. 그래서 참전 군인들의 명예와 보훈은 언제나 지켜져야 마땅하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 왜곡·과장되고, 납득하기 어려운 사법부의 판단으로 1심 재판에서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은 민간인 학살자로 매도되었다. 재판부가 이 판결이 가져올 안보·정치·경제적 파장이나 국제정치적 함의에 대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달라져야 한다. 한순간 방심하면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피아(彼我) 구분이 대단히 어려운 전장 상황에서 살아 돌아온 참전 군인들을 신뢰도가 낮은 현지 자료를 근거로 학살자로 내모는 일은 중단되어야 한다. 군사작전과 전투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단의 세력들이 팀을 이루어 장기간 치밀한 준비를 거쳐 전투 중의 행위를 사법 판단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온다면 국가를 위해 싸울 군인은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2024년은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대한민국은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의 희생과 고통을 헤아리고, 그들의 긍지와 명예를 지켜주어야 한다. 그런 것이 보훈이다. 보훈이 없으면 호국도 없고, 호국이 없으면 국민을 지켜줄 국가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을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되새겨 본다. 🅿

·국민희망저널 2024.06 (제13호) 호국보훈의 달 특별기고 2. 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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