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특별기고 / 이승만 초대 대통령 바로알기] 이승만 대통령 장기 집권했어도 독재자는 아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지난 70여 년 동안 철저하게 대한민국 역사에서 비난과 왜곡의 중심이 되었다.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독재자, 미국의 앞잡이, 친일파’ 등의 왜곡된 평가가 따라다녔다. 오늘날 한국이 선진강국, 부국강병의 나라가 되는 데 숨은 최대의 공로자인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 명실공히 국부(國父)로 인정하고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존경해야 한다.

안호원 편집위원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특임교수,
칼럼니스트, 목회학·상담학 박사

안호원 교수 승인 2024.08.22 21:25 의견 0

이승만 사후 한국에서 진행된 장례식 모습. ⓒ이승만기념관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제59주기 추모식'이 지난달 19일(금)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회장 김남수) 주관으로 개최되었다. 이날 추모식에는 강정애 초대 국가보훈부 장관을 비롯한 황우여, 황교안, 등 각계 인사와 기념사업회 회원, 자유. 애국시민 7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상시청, 추모 식사(式辭), 추모사, 추모의 노래, 헌화·분향 및 유족인사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아쉬운 것은 광주 5.18 묘역에 참석했던 대통령 등 정부 요인 및 정치인들과 특히 젊은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부 이승만에 대한 오해와 진실

죽음에 대해 차별은 있을 수 없지만 차이는 분명 있다. 누구에게나 공(功)과 과(過)는 있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공과 과’가 많이 왜곡되고 특히 ‘공’에 대해서는 과소평가를 하는 등 사실과 달라,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종합적인, 입체적인 팩트체크를 통해 진실을 밝힐 필요가 있다. 십수 년 전부터 국부로 칭송받던 이승만 대통령을 좌파들이 ‘미제의 앞잡이, 친일파 세력들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라고 선동하고 국민들을 세뇌시키며 이승만 대통령을 끊임없이 비판했다. 해방 후 좌파세력들이 이승만을 죽이려하고 김구를 앞세워 정권을 노렸다. 문재인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이었던 이인영은 ‘우리의 국부는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다’라면서 국회에 나와 증언한 바 있다. 평생 ‘이승만 죽이기’에 앞장선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당시 이승만이 없었다면 남한은 북한과 같이 공산화가 되지 않았을까. 공산화되지 않은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감사를 해야 한다. 남한만의 국가가 설립되면서 북한의 김일성 체제와 그 이후 봉건 세습 독재의 모습과 대한민국의 정치사 하나만 비교해보아도 정상인이라면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악의적인 비난과 유언비어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6.25전쟁 발발 시 한강 다리를 폭파하고 헬기를 타고 도주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가장 악질적인 유언비어이자 왜곡된 것이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은 사실과 달리 왜곡된 것이 많은 데 그중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날조된 ‘한강철교 폭파설’

하나는 우리가 사석(私席)에서나 공석(公席)에서 가끔 다툼이 되는 이야기로 “이승만이 자기 혼자 살려고 서울시민을 버리고 혼자 한강을 넘어 도망가면서 한강철교를 폭파했다.”는 것이다. 이는 날조된 것이고 왜곡된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 좌익들과 좌파 언론들이 만든 왜곡 프레임으로, 좌파세력과 야당이 이승만 대통령을 악마화 도구로 사용하는 등 선동을 한 것이다.

1950년 12월 부서진 대동강 철교를 오르는 피난민들. ⓒ연합뉴스(국가기록원 제공)


최근 상영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을 통해 밝혀진 바 있지만, 당시 이 대통령은 참모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서울을 떠날 것을 권유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내가 가긴 어딜 가? 나는 여기를 떠날 수 없어.”라며 건의를 단호하게 물리쳤다. ‘서울을 사수해야 한다.’며 요지부동이었다. 많은 참모들이 위급함을 말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프란체스카 여사가 “각하! 국가원수가 불행해지면 더 큰 혼란이 발생하고 대한민국의 존속이 어렵습니다.”라고 해도 서울 사수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한강 폭파 지시로 민간인 800명 설은 한강철교가 아닌 대동강 철교 사진 속 사람 수를 합한 것이다. 이는 사진만 봐도 바로 입증되는 것이다. 사진 속 인파를 자세히 보면 모두 한겨울 복장이다. 그러나 6.25는 한여름이다. 한강 인도교 폭파라고 알려진 이 사진은 사실 대동강을 건너는 대동강 철교다. 1950년 12월 4일 평양 철수 당시 종군기자 맥스 데스퍼(Max Desfor)가 촬영한 것이다.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세로 인해 유엔군이 평양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철수하자 평양시민들이 폭격으로 무너진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 모습이다. 당시 피난민들은 인도교 근처에 설치된 부교를 이용하여 이동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 민간인이 인도교 위에 있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따라서 민간인 피해는 없고 이동 중인 군경 77명이 사망했음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좌파세력과 좌파언론들이 앞다퉈 부추기며 국민들을 쇄뇌화시켰다. 이것은 당시 북괴가 뿌린 삐라를 보고 좌파들이 날조한 것이며 오해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망명

3.15 부정선거도 왜곡된 부분이 많아 지적하고자 한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대통령 후보로는 자유당은 이승만 현 대통령, 민주당은 조병욱이, 부통령 후보는 자유당 이기붕, 민주당은 장면 부통령이 나왔다. 선거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욱이 미국에서 급사하면서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어 당선이 확실시 되었다. 그러나 이기붕의 부통령은 쉽지 않았다. 이를 직감한 이기붕이 이정재, 임화수 등 정치깡패를 동원, 불법선거가 드러나면서 국만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급기야는 전국 대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정권 타도’로 확대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 부분에서도 왜곡된 것이 마치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을 위에 부정선거를 시도한 것으로 보았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승만 대통령은 단독 후보라 굳이 부정선거를 획책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시위로 인해 다친 학생들의 병실을 방문,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라고 위로의 말을 하기도 했다. 이어 4.19 학생의거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더 이상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

중앙대학교 1960년 4.19 혁명 당시 내무부 앞 연좌시위. ⓒ 위키백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下野)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완전히 뒤바꿔놓았고 현대사에서 잊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다. 정권을 이양한 민주당의 과도정부는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어려움, 특히 안보, 치안의 공백으로 인해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결국,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의 혁명으로 적화되려는 대한민국을 구했다.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북한의 김일성이 남한을 흡수하려고 했지만 박정희 군부가 이를 단호하게 제거하면서 많은 좌파들이 아쉬워하기도 했다고 한다. 좌파들은 한결같이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장기집권을 했을 뿐 독재자는 아니다.


하야 후 이승만 대통령은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망명길에 오른다. 이때도 많은 사람들은 이 대통령이 엄청난 비자금을 갖고 망명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 기자가 망명길에 오른 이 대통령에게 “언제 돌아올 것인가” 물었다.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망명 생활을 한 이 대통령은 생각 외로 어려운 생활을 했고, 이를 딱하게 여긴 지인이 마련해 준 집에서 생활하다 호놀로룰루시 카이무키구 마우타네리 요양원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눈을 감았다. 임종 시 미국 지인이 한 말이 뇌리에 떠오르며 쓸쓸한 죽음에 마음이 아파진다.


“자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는지, 자네가 얼마나 억울한 지를 내가 잘 안다네. 친구여 그것 때문에 자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누가 뭐라해도 이승만 대통령은 선견지명이 있으신 위대한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업적을 남기셨다. 기독교 이념(기독교 입국론)을 담은 헌법을 제정해 삼권분립, 시장경제의 자유민주주의의 체제 확립, 한미상호방위조약, 토지개혁, 여성 참정권, 초등 교육의 의무교육, 무상교육, 장학생 국비 미국 유학, 원자력 산업의 토대를 만들고, 독도의 영유권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업적이 많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선구자, 선각자, 예언자, 애국자, 불세출의 영웅, 위인’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지도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승만은 ‘독재자, 미국의 앞잡이, 친일파, 양민 학살의 주범, 부정선거 방조자, 하와이 망명자, 막대한 비자금 조성자, 플레이보이’ 등 악담들이 따라다녔다. 좌파들은 ‘이승만’이란 존재를 악마화시켰다. ‘이승만’이란 개념을 더럽히는 것이야말로 북의 입장에선 어느 시기에나 절실한 이념적 과제였다. 그것 없이 자신들이 늘 한반도 역사에서 우위에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70여 년 동안 ‘이승만’이 철저하게 대한민국 역사에서 비난과 왜곡의 중심이 되어야 했던 비극의 시작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그 거짓의 역사를 알면서도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이승만의 복원은 대한민국 사회에 많은 의미를 갖는다. 대립과 갈등의 역사를 뛰어넘어 진정 선진화된 사회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이승만에 대한 저주와 왜곡된 거짓은 반드시 풀고 가야 할 숙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실’의 복원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서도 겸허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다행히 지난 2월 1일 개봉한 <건국전쟁>영화가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고(故)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진실히 밝혀지는 계기가 됨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영화 <건국전쟁>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이승만’의 부활이 놀라운 것은 국민들이 70년 동안 모르고 있던 진실에 눈을 뜨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누가 애국자이고, 누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설계했는지, 그 진짜 주인공의 모습에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 <건국전쟁>을 본 많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특히 젊은 층은 “이 대통령에 대한 오해도 풀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이 선진강국, 부국강병의 나라가 된 숨은 최대의 공로자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라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해 명실공히 국부(國父)로 인정하고, 가장 위대한 자랑스런 대통령으로 국민들이 자부심을 갖고 존경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장례 때 인산인해를 이룬 국민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 애통하며 울부짖는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이승만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다. 이 대통령이 많은 나이에 오랫동안 정권을 잡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는 단순한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이승만의 90년의 삶에는 불타는 열정과 논란이 있었지만 이승만과 대한민국은 미국 반공산주의의 심볼이었다.

다큐영화 '건국전쟁'에 소개 된 이승만 전 대통령 미국 국빈방문 카퍼레이드.

미국을 이용한 용미(用美)주의자

이승만 대통령은 흔히 좌파에서 말하는 친미주의자가 아니다.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이 대통령은 혈맹인 미국이라도 국익에 해(害)가 된다면 단호하게 싸웠다. 그 한 예가 반공포로 석방이다.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엄격히 말하면 미국을 이용하는 용미(用美)주의자다. 이 같은 이 대통령의 뚝심이 없었다면 1950년 미군이 철수하고 중. 북. 소련에 의해 적화가 될 수도 있었다. 선견지명이 있는 이 대통령은 미국 내에 있는 인맥을 잘 활용 대한민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동맹을 맺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국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의회 연설(1954. 7. 28)을 끝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산과 계곡들로부터 한. 미 양국 군인들의 영혼이 하나님에게 함께 올라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마음속에 기억하듯 전능하신 하나님도 그들을 어여삐 품어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오늘이 있기까지 밑 거름이되어준 이승만 대통령에게 속죄하는 마음과 함께 감사를 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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