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4주년 특별기고] 6・25 전쟁의 발단과 초전 3일 - 1부

얼마전 광화문 네거리에 북한을 찬양하는 현수막이 걸리는 희한한 일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불법 남침한 한반도 전쟁을 두고 북침이라 왜곡 편집하는 세력도 있다. 이에 역사를 바로 알고 그 교훈을 새기기 위해 38선과 6.25전쟁 초전 3일에 대해 간추려본다.

(본 기고는 2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문병순 편집위원 승인 2024.07.10 23:15 의견 0

6·25 전쟁을 겪은 노병들은 거의 세상을 떠나고 그 아픈 전쟁의 역사를 알려줄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좌파 역사학자들에 의해 북한이 도발한 6·25 남침 전쟁을 북침이라고 하는가 하면 남북 어느 쪽이 먼저 도발했는지 알기 어렵다는 식으로 희석하고 중공군의 불법 침략행위를 중국의 참전이라 하며 미군을 침략자로 서술하는 등 6·25 전쟁의 역사를 왜곡 편집하는 사례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얼마 전에는 광화문 네거리에 북한의 김정은을 찬양하는 현수막이 걸리고 시가지에 인공기가 걸리는가 하면 학교 교실에도 인공기가 걸리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북한은 사흘거리로 미사일을 발사하며 고의적인 도발을 일삼아 왔고 최근에는 고무풍선에 오물을 담아 우리 쪽으로 날려 보내더니 비무장지대에 담벼락(일종의 장벽)을 친다고 법석을 떨고 지뢰가 폭발하여 애꿎은 병사들이 희생하는 사태를 일으키고 있다. 이런 와중에 러시아의 푸틴은 분에 넘칠 정도로 환영하는 희한한 행동을 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북한의 위협을 위협으로 보지 않고 친북·종북을 입에 달고 살면서 간첩행위를 하는 무리도 있다. 심지어는 국회 인사청문회 자리에서도‘북한의 6·25남침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는 말도 되지 않는 질문을 하는 국회의원까지 있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교훈을 아는 민족은 수난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38선이 어떻게 그어졌으며 누가 어떻게 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그 배경부터 수도 서울을 빼앗긴 6월 28일까지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보기로 하겠다.

얄타회담과 한반도 분할

가수 남인수가 부른 ‘가거라 삼팔선’이라는 노래의 제3절에 “삼팔선 세 글자를 누가 지어서 이다지 고개마다 눈물이런가. 손 모아 비나이다. 손 모아 비나이다. 삼팔선아 가거라.”라는 가사가 있는데 이 노래는 "원한의 삼팔선"이라고도 한다. 38선이 그어진 배경은 1945년 2월 4일부터 14일까지 소련의 크림반도 얄타에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영국 수상 처칠, 소련 수상 스탈린 세 정상이 독일과 일본의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독립 문제가 거론되었는데 이때 한반도 신탁통치안과 분할 점령 안이 토의되었다. 이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는 소련을 태평양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미국이 소련을 태평양 전쟁에 끌어들인 이유는 대일전쟁을 조기에 끝내기 위해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서부 방면군(사령관 : 아이젠하워)과 태평양 전구(사령관 : 맥아더)라는 2개의 전쟁터에서 싸웠기 때문에 힘이 들었다.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에 있는 일본 관동군이 100만 명이나 되는데 이 병력이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해 전환 배치된다면 미군의 희생이 클 것으로 판단하고 소련군이 만주에서 관동군을 붙들어 놓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소련에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 점령 권한을 미끼로 준 것이다.

좌로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소련은 얄타회담 이후에 즉각 부대를 만주 지역으로 투입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그 이유는 첫째 소련은 그 당시 동유럽 국가(루마니아, 동독, 헝가리, 폴란드, 체코 등)들에 대한 공산화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쪽에 군대를 파견할 여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둘째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러·일 전쟁에서 일본에 혼이 한번 났기 때문에 선뜻 대들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셋째 1941년에 일·소간에 중립을 지킨다는 중립 조약이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었다.또 하나의 큰 이유는 소련의 늑대 같은 심보 때문이었다. 미국이 동경을 폭격하고 오키나와를 점령하는 것을 보면서 일본이 더 허물어지기를 기다렸다. 미국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자 이틀 후(8일)에 얌체같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붉은 군대(소련 극동군)를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 파도처럼 밀어 넣은 것이다. 소련군이 한반도 북부 웅기에 첫발을 들여놓은 날이 8월 9일이다. 이후 계속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미국 전쟁성(戰爭省)에서는 소련군을 마냥 남하하도록 방치할 수는 없었다.

원한의 38선을 누가 그었나?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소련군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국 전쟁지도본부의 3부 조정위원회(국무부, 육군부, 해군부)에서 국무부 전략정책팀장 링컨 준장의 책임하에 국무부의 전략정책과장 딘 러스크 대령과 육군부의 작전과장 본스틸 대령이 한반도가 표시된 지도를 놓고 적당한 선을 그은 것이 북위 38도 선이다. 이들이 북위 38도 선에 분단선을 그은 것은 수도인 서울과 한반도의 관문인 인천항과 부산항이 포함되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안전을 고려하여 서울로부터 40~50km 북쪽을 선택한 것이다.

좌로부터 링컨 준장, 본스틸 대령, 러스크 대령.



처음에 딘 러스크와 본스틸 두 대령이 북위 38도 선을 그어서 보고하였을 때 링컨 준장은 좀 더 북쪽에서 적당한 선을 찾아보라고 하였으나, 두 대령은 “이 선도 너무 북쪽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소련이 받아들일지도 의문입니다.”라고 하여 원래대로 38도 선을 확정했는데 그때가 1945년 8월 11일 02:00 시였다.


이 분단선은 즉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급히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 소련 측에 통보하였는데, 소련은 아무 반대 없이 덥석 받아들였다. 이 시기에 미군은 한반도로부터 6,000km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상륙하고 있었다. 이렇게 38선이 그어졌고 ‘맥아더 원수’의 일반명령 제1호로 연합국에 전파되었다.

[맥아더 일반명령 제1호 전문]

1. 북위 38도 선 이남의 한반도와 일본열도, 필리핀 등 동남아 지역의 일본군 선임지휘관은 미합중국 태평양 전구 사령관에게 항복한다.
2. 북위 38도 선 이북 만주, 한반도 북부, 사할린, 쿠릴열도 내의 일본군 선임지휘관은 소련 극동군 사령관에게 항복한다.

3. 만주 지역을 제외한 중국 전 지역의 일본군 선임지휘관은 중국 장개석 장군에게 항복한다.



이렇게 하여 한반도는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남북으로 갈라진 것이다. 38선을 그은 두 사람 중 딘 러스크 대령은 케네디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냈고, 본스틸 대령은 1966년~1969년 주한미군 사령관을 지내면서 우리와 다시 인연을 맺었다. 고(故)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미국 방문길에 딘 러스크 전 미 국무장관을 만나 왜 38선을 그어서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느냐고 물으니, 그때를 생각하면 미안하기는 한데 당시 사정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답을 들었다고 술회한 바가 있다.



6·25전쟁은 명백한 김일성의 만행

해방된 한반도는 분단되어 38선에는 철조망이 쳐지고 한동네에 살던 부모 형제가 서로 갈라져 오고 가지를 못하게 되었다. 북한 땅은 소련군이 점령하여 주민을 통제하고 일찍이 김일성을 내세워 괴뢰(꼭두각시)정권을 수립할 준비를 척척 진행해 나갔다. 그러나 남한에는 해방되고 20여 일이 지난 9월 6일에야 미군이 인천을 통해 서울로 들어와 군정을 시작하였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내세워 장차 북한 정권을 이끌어갈 지도자로 키웠지만, 남한에서는 수십 개의 군소정당이 난립하여 누구를 차기 지도자로 세워야 할지를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런 틈을 타고 여운형, 박헌영, 허 헌, 김규식 등 좌익 성향을 가진 사람들과 이승만, 김구,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등 우익진영 인사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각기 다른 정치 노선을 가지고 다투었다.


일반 국민들은 도대체 해방은 되었는데, 지도자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통에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남한에는 우익진영보다는 좌익진영의 박헌영이 해방 전부터 거느리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을 빠르게 규합하여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남로당으로 당명을 바꾸어 북한 김일성의 북로당과 연대하였다. 그리고 신속히 노동조합을 양성하여 철도 파업, 우체국 파업 등을 일으키기 시작하더니, 1946년 10월에는 대구 폭동을 일으켜 사회를 어지럽혔으며, 1948년에는 남한의 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주 4·3폭동을 일으켰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으나, 동년 10월에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세상을 또 한 번 발칵 뒤집어 놓았다.

1949년 김일성 소련 방문(가운데 김일성, 왼쪽 끝 박헌영).



1948년 9월 9일 북한에는 김일성을 지도자로 하는 괴뢰(꼭두각시)정권이 수립되었다. 김일성은 이듬해(1949년) 3월에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을 대동하고 소련 수상 ‘스탈린’을 방문하였다. 김일성은 소련 수상 ‘스탈린’에게 남침하겠으니, 승인해 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스탈린은 반대하였다. 북한이 남한보다 군사력이 강하다는 보장도 없고 아직도 남한에는 미 24군단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망신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승인할 수가 없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승인을 받지 못하고 귀국하였으며, 최용건을 중공 모택동에게 보내 남침을 지원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모택동 역시 쉽게 대답하지 않고 국공내전도 거의 마무리되고 있으니, 그동안 우리를 위해 일본군과 싸워준 조선의용군 2개 사단을 보내주겠다고만 약속하였다. 그때 북으로 넘어간 부대가 조선인으로 구성된 인민해방군 164사단(사단장 김창덕), 166사단(사단장 방호산)이다. 164사단은 북괴군 5사단, 166사단은 북괴군 6사단이 되었다.
1950년 4월에 또다시 스탈린을 방문하고 남침의 기회가 왔으니, 승인해 달라고 건의하였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알류산 열도 – 일본열도 – 필리핀’을 연하는 선으로 한다고 발표하였기 때문에 남한과 대만이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주한미군이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기고 철수했다는 것이다.(1949년 6월 30일까지 주한미군 철수) 세 번째는 군사력 면에서 남한보다 월등하게 우세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군사력 면에서 북한은 240여 대의 탱크, 120여 대의 전투기, 800문이 넘는 야포를 가지고 있었으며, 병력도 남한의 2배에 해당하는 20만 명이었다.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그 자리에서 승인하면서 중국에 가서 모택동 동지를 만나서 지원을 약속받으라고 했다. 스탈린이 이때 자신감을 가지고 승인한 것은 소련도 1949년 8월에 원자탄을 개발함으로써 미국에 꿀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돌아가는 길에 모택동을 방문하여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때 약속받은 것이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 30만 명을 압록강 넘어 한국 전선에 투입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통일을 눈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며 “흥남 철수작전”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6.25 전쟁 직전 북한의 동향

김일성은 1950년 5월부터 위장 평화 공세를 펴기 시작하였다. 특히 6월 11일에는 2명의 특사를 남한으로 내려보내 자기들이 북한에 억류하고 있는 조만식 선생과 남한의 감옥에 갇혀 있는 김삼룡·이주하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렇게 하자는 답변서를 써서 보냈으나, 북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이것은 김일성의 위장 평화 전술이었다.


그렇게 한국을 안심시키면서 후방에 있는 부대들을 38선 지역으로 속속 이동 배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6월 15일에 하달된 정찰 명령 제1호에 의한 행동이며 공격 명령만 내리면 즉시 공격이 가능한 공격 대기 지점으로 이동 전개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낙동강 전선에서 포로로 잡힌 북괴군 제2군단 작전참모 이학구의 진술에서도 명확하게 확인된 사항이다.


그리고 6월 22일에는 전선 사단장들에게 전투명령 1호가 하달되었다. 이 명령서는 소련군 군사고문단에서 작성하여 북괴군 민족보위성(인민군 총참모부)에 넘겨준 문서인데 민족보위성 작전국장 유성철 소장이 한국어로 번역하여 각 사단장에게 내려보낸 것이라고 했다. (1990년 본인이 직접 진술) 그 명령서에는 "각 부대는 6월 23일 12:00시까지 만반의 공격준비를 갖추고 다음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의 해이한 군사 상황

6월 18일 미 국무부의 고문인 덜레스가 특사로 방한하여 의정부 북쪽의 7사단 지역을 시찰해 보고도 별다른 징후가 없다는 식으로 워싱턴에 보고함으로써 미국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한국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군부에서는 1950년 6월에 남침 징후가 있다는 판단하에 경계 태세를 강화하고 장병들의 외출 외박을 중지하고 있었다.

7사단 전선을 시찰하는 덜레스 특사(중앙의 검은 정장).



그런데 군 상층부에서는 이상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런 비상사태하에서 채병덕 총참모장이 사단장과 연대장급 지휘관들을 6월 9일부로 교체하였다. (당시는 육군 외에 해공군이 미약했기 때문에 육군참모총장이 전군을 관할 했기 때문에 채병덕을 총참모장이라고 칭하였음)


전투 중인 장수는 말을 갈아타지 않는다는 것이 병법의 기본인데, 비상대기 상태에서 해당 부대의 전투력 수준을 가장 잘 알고 작전지역을 가장 잘 아는 지휘관들을 바꾸었으니, 이는 중대한 실수였다. 그리고 전투 장비의 1/3 정도가 정비를 위해 후방 정비고에 입고 되어 있어 당장 전장에 투입될 수가 없었다. 상황이 위급하다면 입고된 장비를 긴급하게 수리하여 사용부대로 원복시켜 주는 것이 상식인데 그걸 실행하지 않았다.


6월 23일(금) 갑자기 채병덕 총참모장은 비상경계태세를 해제하고 장병들의 외출·외박을 승인해 버렸다. 그리고 이튿날 6월 24일(토) 아침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주간 상황 보고 회의가 열렸다.

24일(토) 아침 상황을 보고하는 북한정보반장 김종필 중위.



이 자리에서 육본 정보국 북한 정보반장이 38도선 일대에서 적의 움직임이 평시보다 더욱 분망해졌으며, 병력도 지난주에 비해 월등하게 증가되었다며 이는 남침을 준비하는 정황이 분명하다고 보고하였다. 이어서 작전 반장이 보고 하였는데 작전 반장은 북괴군이 남침을 한다면 주공 축선은 의정부 축선이 될 것이므로 의정부 지역에 병력을 증강 배치해야 한다고 보고하면서 상황이 위중함으로 비상경계령을 6월 30일까지만이라도 연장하자는 건의를 하였다. 그러나 채병덕 총참모장(이하 총장)은 어제 해제했는데 오늘 어떻게 번복하느냐며 승인하지 않았다. 이것이 화를 크게 만든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일인데, 자기의 체면을 먼저 생각한 것이다. 그 당시에 배석했던 일부 국장들도 비상 대기태세를 연장하자고 건의했지만, 무안만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24일) 저녁에 육군회관 개관식 파티에 참석하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비몽사몽 잠에 떨어졌다가 채병덕 총장은 새벽잠을 깨우는 요란한 전화별 소리에 수화기를 들었다. (*위와 같은 일련의 상황을 보면 고위층의 누군가가 북한의 사주를 받아 저런 엄청난 실수를 하도록 조작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로 이상했었다.)

1950년 6월 25일 04:00시 북괴군 남침

6월 25일 03:00시 김일성은 비상 회의를 소집하고 "남조선 국방군이 오늘 새벽 1시에 38선을 넘어 우리 공화국을 침범하였다. 우리 인민군대는 04:00시를 기해 국방군을 반격할 것이다."라는 강한 어조로 회의 분위기를 삼엄하게 만들었다. 김일성은 그 자리에서 전선 사령관 김책에게 공격암호 "폭풍"을 건네주며 오늘 04:00시를 기해 전 전선에서 총반격을 가하라고 명령하였다. 이것은 한국군이 먼저 북침을 했다고 뒤집어씌우기 위한 위장 전술이었다. 개성 북쪽에 마련된 관사에서 잠을 자던 국군 1사단 고문관 다리고 대위는 쾅쾅거리는 포 소리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당시에는 4~5명의 미군 장교가 작전·교육을 지도하기 위해 사단마다 고문관으로 파견되어 있었음) 그날은 봄 가뭄이 계속되다가 모처럼 단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리고 대위는 상황이 이상함을 느끼고 지프차에 올라 개성역 쪽으로 나가보았다. 역 쪽으로 나가니, 시커먼 열차가 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열차에서 갑자기 누런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우르르 내려왔다. 주의 깊게 살펴보니 그들은 북괴군이었다.


다리고 대위는 직감적으로 이들이 개성 후방을 치기 위해 밤새 끊어진 철도를 복구하여 병력을 싣고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아군 부대를 만나기 위해 남쪽으로 차를 몰았으나 찾지를 못했다. 🅿

(다음호에 계속)

문병순 정치부 기자
국민안전역량협회 연구위원
국가보훈부 나라사랑강사
민주평통자문위원

국민희망저널 2024년 7월호 (제14호) 6·25전쟁 74주년 특별기고 | 10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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